본문 바로가기

팔공산

팔공산 한티재에서 파개재 너머로 그리고 칠곡한티순교성지 탐방

728x90

 

무더운 여름을 달래려 팔공산 한티재로~

& 칠곡한티순교성지 탐방

 

 

언제 : 2015. 8. 8.(토)

어디로 : 팔고산 한티재휴게소 - 파계재 너머 위치번호 136번 지점까지(대략 왕복 5.6km)

누구랑 ; 홀로

 

 

 

흔적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알다시피 대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덥다.

그래서 대구를 더운 아프리카와 비교해 대프리카라 부른다는 합성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8월 3일 월요일, 아내와 딸내미랑 지리산 칠선계곡을 다녀온 후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문인 경조동문 멤버들과

한 차례 모임을 가진 것 말고는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며, 방에 콕 박혀 더위를 달래고 있었다. 

 

아내가 컨디션이 좋아 함께만 해 준다면 두타산이나 동대봉산으로 해서 오대산 일대의 야생화를 좀 보고오련만

요즈음 아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가자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 

오늘도 별 하릴없이 빈둥거리자니 슬슬 좀이 쑤셔온다.

그 와중에 세월은 고장도 나지 않고 야속하리 만큼 잘도 간다.

 

국민안전처에서 연일 폭서로 인한 피해 예방을 알리는 긴급재난문자가 온다.

이럴 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기는 하나 덥다고 밀리면 애꿎은 세월만 간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아내한테 혼자라도 팔공산에 다녀오마 라고 얘기하고

물 2병, 빵 2개, 참외 1개만 간단히 챙기고, 더위에 쩔은 아파트 문을 과감히 열고 나섰다.

문을 여니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바람이 코끝으로 밀려온다.

올 여름 더위는 과연 유래없는 폭서가 맞기는 한가 보다.

 

더위가 더위인 만큼 오늘은 코스가 멀고 험난하지 않은 한티재휴게소 방향으로 길머리를 틀었다.

한티휴게소에서 대략 2km쯤 되는 파계재까지만 다녀올 요량이었다.

가는 길에 야생화라도 좀 본다면 더할나위 없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예상컨대 서봉에 이르기 전까지는 크게 보여줄 애가 없으리란 짐작이 갔다. 그렇다고

삼복 무더위에 야생화보고자 왕복 16km 거리를 산행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더위 먹은 짓이나 다름없을 게다.

적당히 2km 남짓한 파계재 정도가 오늘은 가장 적당할 것 같다.

  

이 길은 팔공산 종주를 통해 두 번이나 넘어갔던 곳이라 비교적 익숙한 길이다.

그럼에도 작은 고개를 넘고 또 넘기를 되풀이한다. 마치 처음 걸어보는 길처럼 조금은 낯이 설었다.

오르막을 오를 때면 어김없이 땀이 쏟아지고, 쉴 때면 언제 그리 땀을 흘렸느냐는 냥 곧 바로 식어버렸다.

팔공산의 시원한 골바람이 땀에 젖은 몸뚱아리를 금방 말려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걷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저 바람이 시원한 길목에 주저 앉아 마냥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럴 땐 등로 주변의 꽃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데, 예상대로 다양한 개체나 종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미 그러리라고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러하니 다소 식상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어디서나 보고 또 봤던 애들이지만 걔네들과 놀 수밖에 없었다.

 

요즘 흔하디 흔한 짚신나물, 백운산원추리, 흰여로, 일월비비추, 마타리, 누리장나무, 이삭여뀌, 파리풀, 뚝갈, 싱아

뭐 이런 애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나마 싱아를 만난 것은 퍽 다행한 일이었다.

박완서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로 유명한 '싱아'는

과연 누가 다 먹어 치웠는지 들판에도 야산에도 그 흔하던 것이 요즈음은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 많은 산을 다니며 다년생 초본인 싱아를 본 것은 고작 울진 백암산, 다부동 유학산

그리고 오늘 파계재를 넘어가면서 본 기억이 다다. 물론, 아직은 곳곳에 많이 산재해 있겠지만,

그리 쉽고 만만하게 보여주지는 않는 것 같다.

 

등로를 가로막은 나뭇가지에 한 껏 물 오른 짙은 잎은 비록 시야를 가려 조망을 막긴했지만,

숲그늘을 만들어 한 낮의 땡볕을 차단함으로 산을 오르내리는 산객의 발걸음을 훨씬 수월하게 해 준다.

산 아랫동네는 찜통 더위를 방불케 하지만, 산은 그늘도 많고 바람도 시원하다.

게다가 하늘은 맑고 푸르러 하얀구름과 파란 하늘이 대비를 이뤄 더위에 지친 산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가다보면 유독 바람 좋은 길목이 있다. 그곳에 있자면 더 이상 발을 떼기가 싫어진다.

그저 드러누워 하세월 보내고 싶은 맘밖에 안 든다.

그러나 한 발짝 더 움직이면 뭔가 새로운 꽃이라도 하나 더 발견할까 하는 기대감에

처음 계획했던 파계재보다 오히려 1km가 넘는 거리를 더 걷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더 보여주는 애들은 없었다. 운동 잘했다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내친김에 서봉까지 확 가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어 아내한테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했더니 꼼짝도 하기 싫단다.

아내가 데리러 와 주기만 한다면 서봉으로 가 내려가는 길에 꽃도 좀 보겠건만,

내 좋자고 아내한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아쉬움을 달래며,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섰다.

어차피 서봉까지 가지 않을 바에야 지금까지 오면서 보지 못한 꽃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오늘 산행은 가벼운 듯 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산행길었으나 이쯤에서 막을 내리고  

내려 가는 길에 그동안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칠곡한티순교성지로 향했다.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는지 오늘 마음 먹고 한 번 가봤다.

 

한티순교성지는 순교성지란 말에서 그 의미가 부여되듯 과연 예사로운 곳이 아니었다.

주로 경기, 충청 지방의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화전민 생활을 하면서, 천주님을 모시고 모진 생명을 부지하던 참극의 현장이었다.

 

1866년 대원군이 위세를 떨치던 해는 병인박해로 인해 사상 초유의 참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 피가 산천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그렇게 잔인하게 죽어간 목숨들은 바로 이곳에 묻혀 있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순교소설 '새남터'와 같은 비극의 현장이 내 고장 칠곡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한티순교성지는 종파를 초월해 우리 민족의 피맺힌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인 만큼

누구라도 가봐야 할 역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난, 불교 신자도 천주교 신자도, 기독교 신자도 아니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이 살고 묻힌 길을 따라 걸으며 묵념을 했다.

 

'순례의 길'이라 표시된 화살표 방향을 따라 제1처부터 19처까지 따라 걸었다.

기본 소양도 천주교적인 관념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역사의 쓰라린 깊은 상처만 아로새긴 채

할 말을 잃고 나지막한 봉분 앞에 서서 각 처마다 고개를 조아리고 묵념을 하곤 했다.

 

19처까지 오면 37처까지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다 돌아볼까 하다가 그도 만만치 않은 길이라 19처를 지난 갈림길에서 돌아나왔다.

약간 아쉽긴 했지만, 오늘 순례길 탐방은 여기서 마감을 했다.

 

어쨌든 오늘 난, 천주교의 순교성지인 한티순교성지를 방문했다.

한티재를 얼마나 드나들었던가? 그때마다 가봐야지 하면서 마음만 가득했던 곳을 오늘에야 방문을 했다.

각 처마다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진 봉문을 바라보며

숙연해진 마음만 가득 안고 돌아선 길이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방문이었다.

 

 

 

 

 

1. 사진으로 보는 한티재 - 파계재, 무더위 탈출 산행

 

 

한티재휴게소. 오늘은 무더운 날씨를 감안해 한티휴게소를 기점으로 파계재까지만 왕복으로 다녀오기로 한다.  

 

여뀌류 중에는 그 중 이삭이 알알이 맺힌 듯한 이삭여뀌의 색감이 가장 이쁘다. 

 

짚신나물도 흔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꽤 매력적인 꽃이다. 흔하지만 산행길에 심심치 않게 벗이 되어 준다.

 

왜모시물(?) 개모시풀, 거북꼬리풀 등과 같이 자주 혼동이 되는 이 풀도 요즘 산길에는 한창이다.

 

이삭여뀌의 색감이 이뻐 카메라를 수시로 들이댄다.

 

 

파리풀도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얀꽃이 핀 모습은 앙증맞기 그지없다.

 

숲속 안쪽에 하향게 핀 꽃과 빠알갛게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이 공존하는 누리장나무가 한 그루 숨어 있다. 놓칠 수가 없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다가가 렌즈에 담는다. 거리가 있어 별로 똘똘하게 잡지를 못했다.

 

누리장나무. 조금 더 먼 발치에서... 

 

흰여로도 심심찮게 보인다.

 

백운산원추리도 가끔 보인다. 백운산원추리는 남덕유산에서 장수덕유산(서봉)으로 가는 하늘길에서 본 모습을 연상하며 카메라에 담는다.  

 

오늘은 파계재까지 2km만 걷기로 했다. 

 

뚝갈. 뚝갈은 꽃이 피면 자그마한 별모양으로 벌어지며 옹기종기 모여 피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게 다가온다. 

 

여기는 비비추가 자주 보인다. 보통 산 중에서 보는 비비추는 대부분 일월비비추가 많던데 애는 그냥 비비추라고 부른다.  

 

 

삼갈래봉. 다른 길로 빠지지 말고 계속 종주길로 간다.

 

여기는 바위 무더기가 비석처럼 서 있다. 

 

 

 

 

도둑놈의갈고리.  초점을 놓쳤지만 이 애도 꽃이피면 앙증맞기 그지없다.

 

대구파계사 원당봉산 표석. 

 

 

원당봉산 

 

 

 

어수리. 임금의 수라에 올랐다던가 한 식물이다. 이 계통의 식물로서는 구분이 가장 쉽다.  

 

꽃이 있으니 나비가 날아든다.  

 

털별꽃아재비. 예전 같았으면 하찮게 여기며 눈길 한 번 주고 이내 돌아섰건만, 이제는 자연을 보는 눈이 더욱 세심해 진다.

 

작은 고개만댕이 하나 올라서니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보통 이런 지점에 뭔가 있는데 여기는 그리 볼거리가 없다. 하늘만 쳐다본다. 

 

소나무가 일품이다.  

 

 

여기는 파계재. 북쪽으로 제2석굴암 가는 방향이다. 여기서 제2석굴암으로 5km 정도 내려가고 싶었는데 차량 회수 문제가 있어 참아야 했다.

 

 

내친 김에 서봉을 거쳐 동봉으로 해서 수태골로 내려가고 싶어도 역시 차량 회수가 문제로 남는다. 염천의 무더위에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수는 없다. 오늘 목표지점이 여기까지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여기서 1km 남짓 더 가본다.

 

그리고 싱아를 만났다. 박완서의 자전적 성장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친구다. 옛날에는 흔해 빠졌으나 요즘은 보기가 쉽지 않다.

 

비비추, 봉우리를 맺은 모습과 봉우리를 펼친 모습을 함께 담아본다.

 

흰여로의 모습을 전초로 담는다. 전초로 담기가 꽤 어렵지... 

 

오늘 파계재까지 목표로 했다가 136번 지점까지 왔다 간다. 한티재에서 대략 2.8km 지점이다.

 

남덕유산에서 질리도록 보고 또 봤던 백운산원추리. 원추리는 지리산이나 남덕유의 하늘길에 서 있는 모습이 압권이다.

 

요즘은 마타리가 한창이다. 금마타리를 언제 한 번 봐야 할텐데... 

 

고개 너머 흰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에 수를 놓고 있다. 아랫동네 날씨는 지옥이나 여기는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오늘 산행길은 대체로 평이하고 걷기 좋은 길이다. 무더위에 솔숲을 거닐며 힐링한다는 것이 최고가 아닐런지...

 

갈 때 보던 누리장나무, 올 때도 다시 한 번 더 눈맞춤을 한다.

 

 

 

2. 스쳐 가기만 했던 한티순교성지, 오늘 마음 먹고 순례의 길을 걷는 기회를 가졌다.

 

 

한티순교성지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본 내용은 아래 사이트에서 참고하기 위하여 펀 내용입니다. 

http://www.yeongnam.com/mnews 손동욱기자 2014-10-03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있는 한티순교성지는 조정으로부터의 박해를 피해 한티마을에 모여 살고 있던 수십 명의 신자가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이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한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를 피해 한티마을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교우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움막집에 살면서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이어갔고, 신나무골 공소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일어난 수차례의 박해도 간신히 넘긴 한티마을이었지만, 1866년부터 3년간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해 결국 수십 명의 신자가 한자리에서 비극을 맞았다. 당시 순교자로는 서익순과 서태순 베드로, 조 가롤로, 이선이 엘리사벳과 그의 장남 배도령 등이 있으며 이들과 무명 순교자 등 총 37기의 무덤이 성지 안에 흩어져 있다. 한티는 1980년대 초 대구대교구가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성지 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1. 천혜의 은둔지, 한티

 

해발 600m. ‘한티’, 큰 고개라는 이름답게 산은 높고 험했다. 촘촘하게 들어선 나무 사이로 간간이 흘러내려오는 달빛줄기를 등불 삼아 많은 이들이 한티로 숨어들었다. 숨이 밭았고 허기가 내장을 찔러댔지만 아이들도 울지 않았다. 박해의 때였다.

 

한티는 예부터 은둔에 좋은 땅이었다. 지척의 가산산성(사적 216)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적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란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그 곁의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살기에 맞춤이었다. 각기 자신만의 신앙의 역사를 가진 이들 말이다.

 

1801(순조1)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서울·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진보 머루산·안동 우련밭·영양 곧은정·상주 등으로 피란해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외부와 격리된 그곳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박해의 모진 창끝은 피할 수 없었다. 1815(순조 15) 을해박해(乙亥迫害)1827(순조 27) 정해박해(丁亥迫害)때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의 가족과 형제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족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면서부터 1850년대 말에는 제법 큰 신자촌을 형성했다.

 

하지만 박해는 임금이 바뀌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1860(철종 11) 경신박해(庚申迫害) 때에는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이때 김현상 요아킴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났고, 그때부터는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자촌이 꾸려져 갔다.

 

2. 한티 최후의 날, 병인박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극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1866년 대원군에 의해 자행된 병인박해(丙寅迫害)이다.

 

당시만 해도 한티는 안전한 듯 보였다. 하여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및 그의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씨 가정 그리고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란을 들어왔다. 그러던 중 문경 한실의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19일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조카 서상돈은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고,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진 틈을 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던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白紙死)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하는 일이 일어났다. 백지사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한지를 계속 덮어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었다. 처형해야 하는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가 난 포졸과 군사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이후, 1868년 음력 4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이에 심심산골 한티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선참후계,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한다는 잔인한 지침에 따라 재판도 없었다. 다만 가부(可否)에 대한 질문만이 있었다.

 

신앙을 버리겠느냐? 목숨을 버리겠느냐?”

 

그러고는 학살이 이어졌다. 배교하지 않은 조 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를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는 끝까지 뒤따라가서 죽였다. 마을은 불타 없어졌고, 온 산 곳곳에서 시신이 썩어갔다. 후일 간신히 도망쳐 살아남은 신자들이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너무 많이 부패해 옮길 수조차 없었다. 결국 신자들은 시신을 그 자리에 매장해야 했다. 당시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이하 내용은 2014-10-03http://www.yeongnam.com/mnews 영남일보 인터넷 게재 내용을 참고하면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윗글은 인터넷 사이트 영남일보에서 펀 내용이다.

 

=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그저 바라보고 스쳐가기만 했던 한티순교성지를 오늘 처음으로 마음 먹고 방문한다. 아래 주차장에 주차하고 위로 올라간다.

 

순례길을 다 돌아보자면 꽤 먼거리다. 순례차 오는 교인들은 모두 다 돌아보겠지만, 오늘 난 왼쪽 1처부터 19까지만 돌아보고 회귀한다. 그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다.

 

 

왼쪽 영성관쪽으로 올라간다. 

 

옛 공소. 이곳은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그들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된 이곳에서 터를 잡고 생활한 곳을 말한다.

 

 

 

왼쪽 건물은 한티영성관(신학교)

 

 

한티피정의집.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곳이며, 오로지 가름침을 배우고 따르기 위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박해를 피해 숨 막히는 생활을 했던 곳. 얼마나 고달프고 아팠겠는가?

 

그 때 그 시절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비비추는 꽃을 활짝 피운 채 한 많은 원혼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자작나무에 겨우살이가???

 

벌개미취의 보랏빛 길은 더위에 가열된 포장길을 달래준다.  

 

이제, 순교자 묘역을 올라본다.

 

야외 집회를 하는 장소인 모양이다.

 

 

오늘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 

 

37기의 묘역 대부분이 이름 없는 신자들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을 마다않고 순교로 주님을 따른 순진무구한 생명들의 묘역이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역사적 현장이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19기의 묘역을 참배하면서 

이들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으며, 어떻게 순교했는가를 대략이나마 알고 나니

가슴이 먹먹한 것이 그저 숙연해 지기만 했다. 할 말을 잊었다.

이들 모두는 이름 없는 그저 주님을 따르고 의지하고 믿으며 가르침에 순종한 사람들 일 것이다.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권력이

애궂은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하찮게 취급을 했다.

 

죽인 자는 저 세상에서 어찌 살아갈까?

죽은 자의 나지막한 무덤이 더욱 평화롭게 보인다면 무지한 나그네가 아무렇게나 내 뱉은 언어도단에 불과할까?

세월은 가도 잔혹한 역사의 현장은 이렇게 보존되고 있다.

역사는 속일 수 없는 법. 사가의 손끝으로 아무리 장난하고 위장을 해도 진실은 반드시 규명되는 법

 

무지한 나는 오늘 성지에 들러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또 한 번 역사의 피비린내 나는 잔혹성을 보고 깨닫는다.

 

오직 이들이 영생하기만을 기원한다.

 

 

19묘역까지 돌고 출발 지점으로 돌아 나가는 길 

 

31~37기로 올라 가는 길

 

흰길-십자가의길, 노란길-인내의길, 빨간길-겸손의길.  난 오늘 흰길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