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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팔공산 상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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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차가웠지만, 팔공산 상고대는 과연 일품이로고



■ 언제 : 2017. 1. 30(월)

■ 어디로 : 팔공산 하늘정원 - 비로봉(왕복)

■ 누구랑 : 홀로




흔적


에이, 오늘 아침은 기분이 더럽다.

아니 더럽다는 표현은 좀 그런가? 그렇다면 '기분 잡쳤다'로 하자.

별 것도 아닌데 서로 오가는 말이 사납다.

세 치 혀가 문제인가? 아니면 성질머리가 문제인가?

어쨌든 말은 서로 조심하고 볼 일이다.


산이나 가자 싶어 배낭을 꺼냈다.

만경떡을 사기 위해 늘 가던 떡집으로 갔다.

설 연휴 끝날이라 그런지 떡집은 문을 닫았고 옆집 제과점 문이 열려있다.

삼천 몇 백원 주고 빵 3개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수태골로 갈까 하다가 수태골은 삼월이 다 된 후에 가도 꽃다운 꽃을 본 적이 없던지라

그냥 맘 편히 팔공산 비로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발 빠른 진사들은 어디서 찍었는지 벌써 복수초니 노루귀니 마구 찍어 올리더구먼

팔공산은 삼월이 지나 가산산성엘 가야만 복수초를 볼 수 있을 뿐 지금은 팔공산 어디를 가더라도

야생화를 본다는 기대감은 애당초 버리고 가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저 고지가 높으니 상고대라도 봤으면 하는 맘뿐이다.


그러고 보니 팔공산도 식생 환경이 아주 다양한 편임에도 가산산성 외에는 복수초를 본 적이 없고

노루귀마저 단 한 번 조우한 적이 없다.

있는데 못 봤다면 이해가 가지만, 노루귀가 없다면 그건 좀 이해가 안 된다.

팔공산 백번 정도 갔는데 노루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야생화는 차치하고 눈꽃이나 상고대라도 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마저 기대치에 불과하다. 눈 다운 눈이 왔어야지 기대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팔공산 높은 고개 만댕이인 한티재를 넘어가는데 산기슭에 쌓인 눈이 없다.

그늘진 곳에 드문 드문 잔설이 남아 있는 정도다.

그렇다면 굳이 팔공산 하늘정원을 갈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수도사가 있는 치산계곡으로 가버릴까?

운전을 하면서도 자꾸만 곱씹는다.

그러면서 차는 하늘정원으로 가는 동산계곡으로 내 의지랑 아랑곳없이 내뺀다.


오도암으로 가는 원효대사 구도의 길을 지나쳐도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없다.

'역시'하며 이젠 기대했던 희망 사항을 몽땅 버리고

그냥 바람이나 쐴 기분으로 동봉이나 서봉까지 다녀오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맘 편히 먹고 가는데 어느 순간 조그마한 헬기장이 있는 곳을 돌아가는데

이게 뭔 조화 속인지 갑자기 주변이 은빛 설국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두 눈을 의심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조심을 해야 함에도

차는 차대로 굴러가고 두 눈은 두 눈대로 따로 굴러간다.

하얀 상고대는 올라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오호 쾌재라! 이 무슨 얄궂은 조화 속이란 말인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마치 천지가 개벽을 한 것 같다. 불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도무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질 줄을 모른다.

겨울 설산을 한 두 번 다닌 것도 아니고 이보다 더 진한 설국의 세계를 한 두 차례 경험한 것이 아니건만

이토록 가슴 찡한 경우는 근래 없던 일이다.

아침에 잡쳤던 기분이 일시에 봄눈 녹듯 사그라지고 없다.


이제 위로 갈 수록 더 가관일 것은 분명할 터 먼저 놀란 가슴부터 좀 진정시켜야겠다.

가는 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우니 일단 차부터 조심 조심 운전해야겠다.

하늘정원 입구에 다다르니 길이 미끄럽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음에도 대여섯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그래 사람이 적을 수록 좋지. 이런 눈길은 삐대지 않고 온전할 수록 좋지 아니한가.


이런 장관을 이미 예상했는지 오로지 사진만을 찍으러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온 무리와 연세가 연만하신 부부도 보인다.

난, 오늘 혼자다. 함께 오지 못해 이러한 진풍경을 혼자 만끽함에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은 오롯이 혼자가 편하다. 홀로 산에 다닌 적도 많다만 일부러 혼자 내빼듯이 온 적은 없었다.

마치 마눌 약 올리기라도 하는 것 마냥 고소하다.


늘 걷고 걷던 길

하얀 눈이 나뭇가지에 붙은 설화가 만발한 길

서리가 얼어 붙어 꽃으로 피어난 상고대

안개가 얼어 붙은 얼음꽃(빙고대)

그 모두가 합작으로 만든 은빛 설국

그 길은 오늘 내 길이다.


늘 가던 길에 있던 순백의 함박꽃 부럽지 않고

고산지대 서식하는 개회향

철조망을 휘감은 노란 열매 다닥다닥 붙은 노박덩굴

바위틈에 살짝 앉은 앉은좁쌀풀

갈대숲 속에 숨어 있던 보라빛 용담

병사처럼 투구를 쓴 투구꽃과 흰진범

산오이풀, 어수리, 정영엉겅퀴

등로 길섶을 뒤덮다시피한 좀조팝나무의 행렬

마타리, 뚝갈, 산부추, 꼬리말발도리, 국화방망이, 긴산꼬리풀, 꿩의다리, 산꿩의다리

눈개승마, 원추리, 참좁쌀풀, 터리풀, 참나리, 털중나리, 하늘말나리, 톱풀, 노루오줌, 흰숙은노루오줌

흰여로, 기린초, 까치수염, 큰까치수염, 꿀풀, 다래꽃, 마가목, 미역줄나무, 석잠풀, 쥐오줌풀 등

하늘정원에서만 수없이 많은 야생화를 보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다.

오늘을 풍요롭게 한 것은 오로지 눈꽃의 향연이다.


눈이 많아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눈은 오히려 모양이 좋지 않다.

다만 그 세력에 놀랄뿐이다.

눈꽃은 오늘 하늘정원 같은 경우가 가장 예쁜 경우랄 수가 있다.

비록 바람은 세찼지만, 햇빛은 쨍했고 하늘은 푸르디 푸르렀다.

나뭇가지에 붙은 눈은 꽃으로 피어나고

꽃은 서리가 달라붙어 상고대로 발전하고

아리송하긴 해도 상고대엔 안갯속의 수증기가 달라붙어 얼음꽃마저 피우지 않았나 싶다.


이런 경우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다.

자칫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음 나뭇가지에 붙은 눈꽃은 금방 사그라 들었을 것이다.

영하 5℃밖에 안 되는 날씨에 햇빛이 쨍하였으니 만약 바람마저 차갑지 않았더라면

저 정도 눈쯤이야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바로 승화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쁜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다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내려갈 때 보니 바람이 잔잔한 곳의 나무는 올라올 때 봤던 모습이랑 달리 말개졌던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우연찮게 신천지나 다름없는 설국에 와

아침에 언잖았던 마음을 다 녹이고 간다.

결국 오늘 여기오게 된 계기는 마눌 덕분이다.

서로 좋지 않은 감정으로 함께 있다보면 성질대로 내뱉는 말이 상호간에 비수가 될 수 있다.

그럴바에야 누구 하나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이것도 살아보니 삶을 살아가는 지혜의 한 자락이다.


홀로 설국의 향연을 만끽하며 내려가다 보니 괜히 서로 역정을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마음은 그렇지 아니한데 어떤 땐 갑자기 소통이 불통되면서 앞뒤가 꽉 막힌다.

옛날에는 인상 한번 팍 쓰면 기가 죽더니만 세월가니 이젠 말빨도 안 쓴다. 

애면글면하며 이해를 바라나 그 순간은 아무 소용이 없다.

불통이 되는 순간 오로지 서로 나는 맞고 너는 잘못됐다 이렇게 된다.

둘 다 나이를 헛 먹었나 보다.


비로봉에 올라 멀리 희뿌연하게 보이는 칠곡 시가지를 바라보니 아파트로 밀집된 시가지가 보잘 것 없다.

가까이 있는 동봉과 서봉에 올라선 산사람을 보니 오히려 거대하게 보인다.

저 사람들은 오늘 뭣 땜에 여기까지 왔을까?

내 기분과는 달리 눈 덮인 산을 보고자 왔겠지.

하얀 눈밭을 걸으며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흉해진 마음이 순백으로 하얗게 물 들었을까?


난, 그랬다. 오늘 산에 와서 찝찝한 기분을 털었다.

아니 내가 털었다기 보다는 산이 나를 털어주었다.

그것도 하얀 순백의 팔공산이

집에 들어갈 땐 짐짓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속으론 웃자고 했지만 겉으론 억지 미소가 나오지 않는다.

마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디 갔느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어딜 다녀오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곁눈질 하는 인상이 아침에 내가 나올 때 보단 선해 보인다.

시간이 약이었나 보다.


















쥐똥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