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육지 속 섬 '무섬마을'로 떠나는 시간여행
한국교직원신문 2013-05-06
무섬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비가 내려 내성천 강물이 찰랑찰랑하게 넘치는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외나무다리는 시멘트 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 육지 속의 섬마을인 무섬마을을 외부세계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소통의 통로였다.
외나무 다리 가로질러 추억의 물길이 돌다
‘솟구쳐 흐르는 물줄기모양 뻗어 내린 소백산 준령(峻嶺)이 어쩌다
여기서 맥(脈)이 끊기며 마치 범이 꼬리를 사리듯 돌려 맺혔다.
그 맺어진 데서 다시 잔잔한 구릉(丘陵)이 좌우로 퍼진 한복판에
큰 마을이 있으니 세칭 이 골을 김씨 마을이라 한다.
필재의 집은 이 마을의 종가(宗家)요. 그는 종손(宗孫)이다.’
종가제도를 유지하려는 구세대와 숨막히는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신세대의 갈등을 그린 정한숙 단편소설 ‘고가’에 등장하는 김씨 마을은 다름 아닌 무섬마을이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고립돼 무섬마을로 불리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는 추억의 외나무다리가 보존된 강마을로도 유명하다.
무섬마을은 산줄기와 물이 휘둥그스름하게 굽이져 태극 모양을 이루는 산태극수태극 형상으로 풍수지리적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뒷산은 태백산 줄기이고 무섬마을을 둘러싼 산줄기는 소백산이다. 태백산 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내성천과 소백산 줄기에서 발원한 서천이 마을 뒤에서 합류해 350도 정도로 마을을 휘돌아 흐른다.
지금은 마을 앞 수도교와 마을 뒤 무섬교가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고 있지만 40년 전만 해도 무섬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책보를 메고 학교 가는 아이, 장가가는 새신랑, 꽃가마 타고 시집오는 새색시, 그리고 황천길로 떠나는 상여도 어김없이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큰비라도 내리면 외나무다리가 물에 떠내려가 무섬마을은 고립무원의 섬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농사지을 땅 한 뼘 없는 이곳에 사람들은 왜 들어와 살았을까.
박·김씨 뿌리내린 부유한 양반마을
무섬마을의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강 건넛마을에 살던 반남 박씨가 먼저 터를 개척했고 그 후 입향시조인 박수의 증손녀 사위인 신성 김씨가 안착했다. 마을주민 중 박씨와 김씨가 아닌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 시집 온 여성뿐.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을 만들어 지역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하고, 좌우익으로 나눠 격렬한 사상토론을 벌였던 한국전쟁 때도 마을이 온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민들이 모두 일가친척인 때문이었다.
논도 밭도 없는 강마을이 번성한 이유는 주민들이 모두 양반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무섬마을을 중심으로 직경 30리가 모두 마을 소유 토지였다. 심지어 안동과 예천 경계에 솟은 학가산 아래까지 마을 소유 토지가 있을 정도로 부촌이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면 외나무다리를 건너 무섬마을로 곡식을 실어 나르는 소작농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무섬마을 사람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에도 향약을 헌법처럼 수호하고 있다. 경로효친을 선양하고 환경파괴를 금하는 향약에 따라 마을에는 그 흔한 슈퍼마켓이나 양옥집도 없다.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마을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내겠다는 마을 어른들의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즈넉한 고샅길을 걷다 보면 조선 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120세대 500여 명이 살던 무섬마을의 자랑거리는 만죽재와 해우당 등 고색창연한 고택들. 40여 채 가운데 30여 채가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이거나 초가집으로 이 중 9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사랑채, 안채, 대청마루에 널찍한 마당까지 갖춘 고택들은 돌담이 자연스럽게 골목을 이루고 있다. 잘 가꿔진 정원과 텃밭, 그리고 골목에는 철 따라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 정겨운 고향 풍경을 연출한다.
조선 시대에 건축된 기와집과 초가집이 처마를 맞댄 무섬마을 전경.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반남 박씨 판관공파의 종가인 만죽재. 해우당은 19세기 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 선생이 지은 집으로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김위진가옥은 평범해 보이지만 수리를 하기 위해 땅을 파자 엽전이 1톤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이나 나왔다는 부잣집.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중략>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정원이 아기자기한 김뢰진가옥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 시인은 사랑하는 부인을 무섬마을에 두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별리(別離)’라는 시로 노래했다. 특이하게도 시인은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입장에서 시를 지었다. 무섬마을의 무섬문화촌 앞에는 서예가이기도 한 부인 김난희씨가 쓴 ‘별리’ 시비가 옛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단절·소통 함께 간직한 외나무다리
무섬마을의 아이콘은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1972년 시멘트로 잠수교를 놓기 전까지 무섬마을 사람들은 외나무다리를 통해 바깥세상과 소통했다. 외나무다리는 음력 9월 9일에 가설하고 이듬해 3월 3일에 철거했다. 강물이 불어나는 여름에는 외나무다리가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외나무다리가 없는 여름에는 바지를 홀딱 벗은 후 머리에 이고 건넜지. 강둑을 높이기 전에는 대청마루에 앉아 강을 건너는 사람의 엉덩이만 봐도 누군지 다 알아. 젊은이들은 소 꼬랑지를 잡고 헤엄쳐서 건너기도 했어. 핵교 가기 싫어 일부러 물에 빠지는 아이들도 많았지.”
무섬마을 노인들은 요즘도 모이기만 하면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시절의 해프닝을 기억해내고 박장대소한다. 당시 외지인들은 강 건너에 도착하면 가느다란 외나무다리에 주눅부터 들었다고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보지만 강 중간쯤에 도착하면 물살에 어지럼증을 느껴 양팔을 돌리며 균형을 잡다 결국 강물에 거꾸로 처박혀 폭소를 자아냈다고 한다.
무섬마을에 둑을 쌓기 전인 1960년대에는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백사장이 펼쳐졌다. 금빛 모래가 반짝이는 드넓은 백사장은 육지 속의 섬마을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유일한 놀이터이자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꿈을 키우는 무대였다. 그래서 무섬마을 출신 중 수영, 달리기, 씨름, 고기잡이를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는 본래 3개였다. 수도교가 있는 곳에는 영주로 장 보러 다니는 외나무다리를 놓았고, 무섬교 자리에는 학교 가는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현재의 외나무다리는 강 건너 논밭으로 오가던 다리.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외나무다리는 2005년 옛 추억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태어났다.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는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S자 곡선을 그리는 외나무다리의 폭은 겨우 20~25㎝. 다리를 건널 때는 회오리를 일으키는 발아래 물살을 보지 말고 4~5m 앞을 보는 것이 요령. 앞만 보다가는 자칫 정신이 혼미해져 발을 헛디디기 십상이다. 외나무다리 곳곳에는 여분의 짧은 다리인 ‘비껴다리’가 놓여 있어 마주 오는 이에게 길을 양보할 수 있다. 비껴다리가 없다면 속담처럼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날 수밖에 없을 터.
꽃가마 타고 내성천을 건너 시집오면 죽어 꽃상여를 타야만 다시 건널 수 있었던 외나무다리. 친정 식구가 그리워도 치마 입은 아녀자라 건널 수 없었던 원수 같은 외나무다리, 죽어 꽃상여를 타야만 건널 수 있었던 불구대천 같은 외나무다리. 살아 한 번 건너고 죽어 한 번 건너는 무섬마을 아녀자들에게 그 외나무다리는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족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던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가 이제는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통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박강섭 국민일보 관광전문기자
◆ 가는길
중앙고속도로 영주IC에서 28번 국도로 갈아타고 영주 시내까지 간다. 영주소방서에서 서천과 나란히 달리는 도로를 타고 가다 무섬교를 건너면 무섬마을이다. 영주소방서에서 무섬마을까지 약 8㎞. 영주터미널에서 무섬마을까지 하루 4차례 시내버스가 다닌다.
◆ 볼거리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에는 전통문화와 관련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에서 비롯됐다. 그 후 퇴계 이황이 조정에 건의해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소나무 숲이 멋스러운 소수서원에는 강학당, 장서각, 일신재 등 옛 건물과 소수박물관이 있다.
소수서원 옆에 조성된 선비촌(www.sunbichon.net)은 전통가옥에서 숙박하며 전통생활을 체험하는 민속촌. 1만8000평에 기와집과 초가집 12채를 비롯해 강학당, 물레방앗간, 대장간, 정자 등 모두 40채의 옛 건물을 지어 조선 시대 자연부락을 재현했다. 소수서원에서 선비촌을 거쳐 부석사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의 사과밭에서는 5월 초에 하얀 사과 꽃이 눈이 내린 듯 황홀하게 핀다.
2011년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한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 자락을 에두르는 145㎞ 길이의 문화생태탐방로로 계절마다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12자락 중 1자락(선비길~구곡길~달밭길 13㎞)과 3자락(죽령옛길(사진)~용부원길~장림말길 12㎞)이 인기. 1자락 시작점인 선비촌에 안내센터가 개설되어 있다.
영주시는 매년 가을에 무섬마을에서 무섬외나무다리축제를 개최한다. 고택에서의 규방공예 체험, 백사장에 2㎞ 길이의 영주풍기인견 원단을 걸어놓고 오방색으로 염색하는 퍼포먼스, 추억의 학예회, 추억의 외나무다리 건너기, 상여 메고 외나무다리 건너기 등 다채로운 체험 이벤트가 펼쳐진다.
◆ 먹거리
무섬마을의 유일한 음식점인 ‘무섬골동반(054-634-8000)’은 영주시가 선정한 지역대표 향토음식점.
골동반(骨董飯)은 궁중의 수라상에 오른 비빔밥으로 여러 종류의 산채를 넣어 현대인의 입맛에 맞도록 재현한 음식이다. 이밖에도 퇴계 이황이 유생들과 즐겨먹던 한정식으로 보리밥, 콩나물, 고등어조림, 더덕장아찌 등이 나오는 무섬선비정식도 정갈하고 맛있다.
◆ 잠자리
무섬마을에는 김한직가옥(011-783-4013), 박종우가옥(016-879-0425)을 비롯해 민박이 가능한 전통한옥이 14채나 있다. 숙박료는 5만원 안팎. 단체객의 경우 무섬전통한옥체험관(054-634-0040)에서 최대 100명이 숙박을 할 수 있다(영주시 홈페이지 www.yeo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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