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울산에 가다 … 신화처럼 숨쉬는 고래를 만나다
한국교직원신문 2013-04-22
물이 빠진 진하해변과 모래톱으로 연결된 명선도에 오메가(Ω) 모양의 해가 떠오르고 있다. 오메가 모양의 해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해가 바다에 반사돼 나타나는 희귀한 현상으로 고래가 뛰어놀던 울산 앞바다의 대형화물선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자~ 떠나자, 귀신고래 놀던 그 곳으로
5000년 전 새겨진 암각화 속 고래들
새끼 업은 귀신고래, 작살 맞은 귀신고래, 분기하는 북방긴수염고래, 넓은 주름의 혹등고래, 하얀 배를 드러낸 범고래, 사각형 머리의 향고래….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 등장하는 고래 특집 영상이 아니다. 하나같이 울산 앞바다에서 뛰어놀던 고래의 모습이다. 그것도 선사시대 바위에 그려진 고래들이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도 불구하고 망원경 속으로 들어온 반구대 암각화의 생생함은 눈앞에서 마치 고래가 뛰어노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고래를 비롯한 300여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
암각화 탁본에서 고래를 뽑아 채색한 것.
반구대 암각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1년 12월 25일. 물속에 고래 그림이 있다는 동네 아이의 제보로 발견돼 고고학계에서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반구대 암각화는 높이 3m, 폭 10m의 바위에 사람, 호랑이, 여우, 고래, 물개, 배, 그물 등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 중 고래 그림은 58점.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 대곡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연고산 자락이 뻗어 내리다 우뚝 멈추면서 마치 거북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의 반구대(盤龜臺)에서 1.2㎞ 떨어진 곳이다. 울산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65년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연중 5∼6개월 물속에 잠겨 안타깝게도 암각화는 갈수기에만 볼 수 있다.
울산 앞바다 고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선사인 뿐만이 아니었다. 100여 년 전인 1912년에는 미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로이 채프맨 앤드류스(1884~1960)가 ‘악마 물고기(Devil's Fish)’를 찾아 일본의 포경선을 타고 ‘물 반 고래 반’의 고장인 울산 장생포를 찾았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귀신고래라고 부르던 회색의 거대한 고래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장생포에서 1년 동안 머물며 귀신고래를 연구한 앤드류스는 귀신이 곡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이 악마 물고기에게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훗날 뉴욕박물관장을 역임한 ‘고래박사’ 로이 채프맨 앤드류스. 카우보이모자가 잘 어울리는 그는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모델이었다.
운 좋으면 참돌고래 군무·향고래 등도 구경
귀신고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울산 바닷가 여행은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처럼 흥겹고 영화 ‘인디아나 존스’처럼 신비롭다. 출발점은 새해 첫날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서생면의 간절곶.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등대와 세계에서 가장 큰 우체통이 이색적인 간절곶 앞바다는 귀신고래들이 좋아하는 암초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언덕 위에 있는 하얀색 저택은 드라마 ‘욕망의 불꽃’ 촬영지.
길이 16m에 무게가 35t이나 되는 귀신고래는 여느 고래와 달리 피부가 회색인데다 따개비 등이 붙었다 떨어진 하얀색의 둥근 자국들이 많아 무섭게 생겼다.
하지만 암초에 붙은 미역을 따먹기 위해 육지와 가까운 연안을 놀이터로 삼는 습성 때문에 반구대 암각화와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 등장할 정도로 한국인에게는 친숙하다. 그러나 귀신고래는 남획으로 멸종되다시피 해 1970년대 말 이후로 울산을 비롯한 동해안 연안에서는 공식적으로 발견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돌고래떼가 울산 앞바다에서 유영을 즐기고 있다. 운이 좋으면 수천 마리의 돌고래떼를 관찰할 수도 있다.
물빛이 맑기로 유명한 진하해변도 간절곶과 마찬가지로 해돋이 명소. 물이 빠지면 해변과 모래톱으로 연결되는 명선도의 소나무 사이에서 떠오르는 해가 황홀하다. 특히 바다안개가 자욱한 날 아침에 명선도 주변에서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선들과 점점이 떠있는 암초는 한 폭의 풍경화다.
앤드류스가 귀신고래를 추적하기 위해 머물렀던 장생포는 고래잡이가 금지된 1987년까지만 해도 포경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집채 크기의 고래를 끌고 오면 축제 분위기로 들뜨던 곳. 고래고기를 맛보기 위한 미식가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장생포는 지금은 그물에 걸려 올라온 고래고기를 파는 음식점과 고래박물관이 옛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이달부터 운항을 시작한 장생포의 고래관광 크루즈 선은 빌딩보다 높은 화물선 사이를 빠져나와 방어진을 끼고 북쪽으로 키를 잡는다. 아침 햇살에 젖어 더욱 붉은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왕비가 호국룡이 되어 바다에 잠겼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 대왕암 뒤로는 해송과 키 자랑을 하는 울기등대가 귀신고래가 뛰어놀던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고래 구경 포인트는 정자항에서 동쪽으로 10∼20㎞ 떨어진 바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1000~3000마리에 이르는 참돌고래 떼가 수면 위로 튀어 올라 군무를 펼친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참돌고래 떼를 발견하고 군무까지 감상하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억세게 운이 좋은 날에는 동해안을 따라 회유하는 향고래, 흑범고래, 밍크고래, 큰머리돌고래, 큰돌고래, 범고래도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읍천·화암주상절리
온산 산업단지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에 의해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해안도로는 주전동에서 비로소 자연 그대로의 해안선을 벗한다. 주전해변은 울산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로 아담한 백사장에는 검은 몽돌이 깔려 있다. 하얀 파도가 쓸려나갈 때마다 몽돌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세상 어떤 악기와 목소리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화음.
주전에서 귀신고래가 출몰하던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던 해안도로는 정자항에 도착하기 전 판지마을 앞바다에서 ‘곽암(藿巖)’을 만난다. 곽암은 미역이 붙어서 자라는 바위로 울산지역 토호였던 박윤웅이 고려의 왕건을 도운 공로로 하사받았다는 암초. 곽암에 붙어 자라는 돌미역은 맛이 좋기로 유명해 당시에 미역채취권은 농토 못지않게 귀중한 재산이었다. 미역을 먹는 귀신고래가 곽암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정자항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주상절리로 유명한 강동 화암마을이다. 주상절리는 분출된 용암이 냉각되면서 열 수축 작용으로 단면이 육각형이나 삼각형으로 된 기둥 모양의 바위가 겹쳐 있는 특이한 지질. 2000만 년 전에 형성된 화암마을의 주상절리는 마치 육각형의 연필을 쌓아놓은 듯하다. ‘화암(花岩)’이라는 마을 이름은 주상절리의 단면이 꽃무늬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졌다.
연필을 쌓아놓은 듯한 화암주상절리.
주상절리는 화암마을에서 6~7㎞ 떨어진 경주 양남면의 읍천리에서도 발견된다. 화암주상절리와 해저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읍천주상절리는 바닷가 언덕에 주둔해있던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읍천주상절리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부채꼴 모양. 육각형의 거대한 돌기둥들을 바다 속에 가지런히 깔아서 마치 돌로 부채를 펼친 듯 한 형상이라고나 할까. 주상절리가 수평으로 누워있는 경우도 드물지만 동그랗게 형성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울산의 고래연구소가 포상금까지 걸고 추적하고 있는 귀신고래, ‘인디아나 존스’ 5탄에나 나올법한 그 귀신고래가 2년 전 읍천주상절리 앞바다 10마일 해상에서 조업하던 어민들에게 두 마리나 목격됐다고 한다.
귀신고래가 출몰한다는 날씨 궂은 날. 암초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귀신고래가 숨 쉴 때 나오는 분기처럼 보이는 것은 녀석에 대한 추억 때문이리라.
박강섭 국민일보 관광전문기자
여행수첩 (지역번호 052)
◆가는길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6.5㎞ 달려 우회전하면 반구대 진입로가 나온다. 울산 시내에서 온양을 거쳐 간절곶 등대로 간 후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 달리면 명선도 해돋이를 감상하는 진하해수욕장.
다시 울산 시내로 되돌아와 ‘고래의 고향’ 장생포를 둘러본 후 울기등대·대왕암을 거쳐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주전항, 정자항, 강동화암주상절리, 경주 읍천동 부채꼴 주장절리가 나온다.
◆볼거리
반구대 입구에 위치한 울산암각화전시관은 반구대 암각화와 선사시대 바위그림인 천전리 각석의 실물 모형과 영상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장생포 고래박물관(256-6301)은 고래잡이 금지 이후 사라져가는 포경 유물 2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12.4m 길이의 브라이드고래 골격과 13.5m 길이의 한국계 귀신고래 모형, 고래해체장, 반구대 암각화관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야외에는 국내 유일의 포경선인 제6진양호도 전시되어 있다. 장생포 고래박물관 옆에 위치한 고래생태체험관에서는 하루 4차례 펼쳐지는 돌고래쇼도 관람할 수 있다.
울산고래축제가 25일부터 나흘 동안 ‘고래 안에 울산 있다’를 주제로 장생포와 태화강 일원에서 개최된다.
이번 축제는 반구대암각화의 고래사냥을 모티브로 선사인들의 ‘선사고래잡이재연’을 생중계하는 퍼포먼스와 고래 퍼레이드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태화강에서 펼쳐지는 수상경기인 ‘고래배 경주대회’와 레이저, 영상, 불꽃이 어우러진 ‘고래 오딧세이’, 그리고 어로도구 만들기, 움집 만들기, 고래심줄 당기기, 빗살무늬토기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곁들여진다.
하루 두 차례 운항하는 고래관광크루즈선 승선료는 어른 2만원, 어린이 1만원으로 수온이 높은 날에는 고래를 관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276-8476).
◆먹거리
12가지 맛을 자랑하는 고래고기는 울산을 대표하는 별미. 장생포를 비롯해 울산 전역에 고래고기 전문음식점 100여 곳이 성업 중이다. 고래를 일부러 잡지는 않지만 그물에 걸린 밍크고래 등 한 해 500여 마리가 장생포에서 해체된 후 유통된다.
고래고기 음식은 얼린 목살과 가슴살 부위인 우네, 꼬리와 지느러미 부위인 오베기, 육회, 수육, 찌게 등이 차례로 나온다. 처음 먹는 사람은 특유의 냄새로 젓가락이 가지 않지만 한 번만 먹으면 그 독특한 맛에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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