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미당 서정주의 고향 … 詩 따라 걷는 ‘고창’ 나들이
한국교직원신문 2013-05-20
호젓한 황톳길과 원두막이 시심을 자극하는 고창 학원농장의 청보리가 건듯 부는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다.
풍경화를 가슴에 담다 … 청보리 익어가는 '시인의 마을'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 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로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서정주 ‘질마재의 노래’
곰소만이 두루마리 풍경화처럼 펼쳐지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진마마을은 미당 서정주(1915~2000)가 태어난 시인의 마을이다.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소금꽃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마을에서 성장한 시인은 훗날 ‘질마재의 노래’라는 시에 고향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았다. 질마재는 마을 뒷산인 소요산 자락을 넘나드는 2㎞ 길이의 야트막한 고개로 질마는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
질마재는 시인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길을 떠날 때 넘던 고개이자 진마마을 사람들이 해산물이나 소금을 지게에 지고 넘던 애환의 길이다. 옛 모습대로 복원한 시인의 초가집 생가와 폐교를 개조해 만든 미당시문학관이 위치한 진마마을에서 부안면 소재지를 연결하는 질마재는 포장도로로 바뀌어 옛길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곰소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옛날의 그 바람이다.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회고했다. 산자락에 터를 잡은 올망졸망한 농가와 들판, 그리고 변산반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질마재 고갯마루를 스치는 솔바람은 시인의 상상력을 키운 바람이기도 하다. 짭조름한 소금기 묻어나는 솔바람에는 그윽한 아카시아 향기와 청보리가 익어가는 향긋한 냄새도 섞여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킨다.
옛 학교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원래 하나였던 듯 잘 어울리는 미당시문학관은 질마재 아래에 위치한다. 미당의 육필원고와 애장품 등 유품 5000여 점을 보관 전시한 미당시문학관과 미당의 생가는 10분 거리. 초가지붕에 황토로 복원한 생가는 미당이 어린 시절을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생가 아래에 위치한 좌치나루터는 마을 사람들이 장에 갈 때 들고 나던 곳으로 배가 다니던 분주함은 이제 기억과 흔적으로만 남았다.
진마마을 맞은편의 안현리 돋음볕마을은 가을에 300억 송이의 국화가 피는 국화마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한 ‘국화 옆에서’를 주제로 마을을 단장했다. 집집마다 지붕과 담에 집주인의 얼굴과 국화꽃이 그려진 고샅길을 돌아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면 시인의 무덤이 나온다. 시인은 무서리가 내리는 가을에 노란 국화꽃이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자태로 구릉을 뒤덮는 꽃밭에 누워 고향 마을을 그리고 있다.
시인의 생가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인천강을 건너 선운사의 도솔암에 오르면 아직 지지 않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선운산 신록을 도화지 삼아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철 이른 계절에 선운사를 찾았던 시인은 ‘선운사 동구’라는 시로 피지 않은 동백꽃을 아쉬워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도솔암은 진흥왕이 선운사를 찾아와 가장 사랑했던 도솔왕비와 중애공주의 이름을 따 창건한 암자로 뒤에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칠송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높이 13m·너비 3m로 두툼한 입술과 살짝 치켜 올라간 눈, 그리고 희미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도솔암에서 조붓한 산길을 걸어 내원궁의 손바닥만한 마당에 서면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신록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순백의 꽃을 피운 조팝나무 군락은 일엽편주처럼 파도타기를 탄다. 신록을 뚫고 우뚝 솟은 천마봉은 보기에도 아찔한 바윗덩어리. 말발굽 형상의 바위 사이로 천마봉에 오르는 철계단이 아찔하다. 천마봉 너머는 서해의 해넘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낙조대.
고창에는 유난히 보리밭이 많다. 그중에서도 공음면의 학원농장 청보리밭은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이 하늘과 맞닿아 이색적인 풍경을 그리는 곳. 이곳의 청보리밭은 학원농장 17만 평을 비롯해 경관농업지구로 지정된 이웃마을 보리밭까지 모두 30여만 평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구릉이 사방팔방으로 지평선을 그린다. 청보리밭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황톳길과 원두막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을 되찾는 동심의 공간.
보리밭의 하루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보리밭은 학원농장을 대표하는 장면. 종달새가 포르르 날아오르고 보리 익는 향긋한 냄새가 어릴 적 고향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해질녘 보리밭 사이로 난 황톳길을 걷다 보면 들일 나갔던 아버지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도 학원농장의 매력. 초록색에서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오뉴월의 보리밭을 마주하면 괜스레 허기가 지게 마련. 시인은 ‘보릿고개’라는 시에서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사월 초파일 뻐꾹새 새로 울어
물든 청보리
깎인 수정같이 마른 네 몸에
오슬한 비취의 그리메를 드리우더니
어느만큼 갔느냐, 굶주리어 간 아이
오월 단오는
네 발바닥 빛깔로 보리는 익어
우리 가슴마다 그 까슬한 가시라기를 비비는데”
다 자란 보리나 밀이 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모양을 맥랑(麥浪)이라고 한다. 학원농장의 맥랑은 파리 교외의 한적한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sur-Oise) 들판의 맥랑과 무척 닮았다. 오베르 쉬르 와즈의 들판은 빈센트 반 고흐가 권총 자살 하루 전에 그린 불후의 명작 ‘까마귀 나는 보리밭(혹은 밀밭)’의 배경으로 학원농장 보리밭과 다른 점은 까마귀 대신 종달새가 날아오르고 삼나무 대신 뽕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이라고나 할까.
고창은 전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고장으로 화순 및 강화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창천을 따라 산재한 2000여 기의 고인돌 중 공식적으로 확인된 고인돌만 1600여 기.
고인돌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고창에서도 전원범 시인의 생가마을인 고창읍 도산리의 북방식 고인돌만큼 잘 생긴 돌도 드물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도산리 고인돌은 넓은 판석 2개를 세로로 세우고 그 위에 상석을 얹은 형태로 30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시인에게 고인돌은 어떤 의미일까? 어릴 적부터 고인돌과 함께 살아온 시인은 “고인돌은 착한 조선의 사람들이 저승에서 긴 영원살이를 하다가 심심할 때면 불러서 가려운 곳을 긁어 달라고 부탁하던 마고 선녀의 집”이라고 말했다. 고인돌이 손자의 등을 긁어주는 할머니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손 같은 존재라는 뜻일까.
고인돌박물관에서 산지형 저층 습지로 복원된 운곡 습지를 거쳐 운곡저수지에 이르는 3.4㎞ 길이의 오베이골 탐방로가 끝나는 곳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눈길을 끈다. 운곡지석묘로 불리는 이 고인돌은 높이 5m에 둘레 16m로 무게는 무려 300여 톤. 어떻게 채석해서 어떻게 옮겨왔는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이다.
몇 해 전 고창군에서는 건장한 고등학생 100여 명을 동원해 통나무를 깔고 10톤 무게의 고인돌을 평지에서 끄는 시연회를 가졌다. 산술적으로 3000명을 동원하면 운곡지석묘를 옮길 수 있겠지만 지형상 수천 명이 몇 줄로 늘어서서 경사가 급한 산기슭으로 집채만 한 고인돌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마고 선녀처럼 순박한 고창 사람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박강섭 국민일보 관광전문기자
여행수첩 (지역번호 063)
◆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나들목에서 22번 국도로 갈아타면 선운산과 질마재가 가깝고, 고창나들목에서 내리면 고인돌유적이 지척이다. KTX 등 기차를 타고 정읍역에 내리면 고창까지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창터미널까지 버스로 3시간 30분.
◆ 볼거리
-고창의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고인돌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고인돌길(8.89㎞), 장살비재에서 출발하는 복분자·풍천장어길(8.48㎞), 소요산을 한바퀴 도는 질마재길(12.64㎞), 그리고 풍천에서 선운사를 거쳐 좌치나루터까지 이어지는 보은길(19.84㎞) 등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고색창연마을로 불리는 신림면의 가평마을은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로 빨래터, 석장승, 고인돌, 돌담길 등이 향수를 자극한다. 숙식이 가능한 마을체험관에서 농사체험 등을 경험해 볼 수 있다. 가평마을에서 2㎞ 떨어진 유점마을은 지리산 청학동처럼 요즘도 갓을 쓰고 사는 전통마을.
-동호해수욕장 옆에 위치한 심원면의 삼양사염전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염전. 드넓은 염전과 소금 창고를 붉게 물들이는 해질녘 풍경이 매혹적이다. 소금은 송홧가루가 날리고 아카시아 향기가 그윽한 오뉴월에 생산된 천일염을 최고로 꼽는다. 상하면의 구시포해수욕장은 바닷물 염도가 높아 모래찜질과 해수찜을 즐기기에 좋다.
◆ 먹거리
갯벌풍천장어는 갯벌에서 양식한 장어를 6개월 동안 바다의 가두리양식장에서 사료 없이 키운 것으로 양식장어에 비해 맛이 담백하고 쫄깃쫄깃하다. 풍천(風川)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바람 부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명은 아니다. 고창읍내의 용궁회관(562-6464)은 갯벌풍천장어 전문점으로 소금구이와 양념구이가 맛있다.
◆ 잠자리
학원농장(564-9897)엔 관광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특산물 판매장이 마련되어 있다. 학원농장에서 생산된 보리와 메밀이 주 메뉴인 음식점에는 보리새싹비빔밥,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전 등 추억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특산물 판매장에서는 추억의 보리개떡, 보리쌀, 엿기름, 미숫가루, 보리차 등을 판매한다. 선운사 입구에 선운산관광호텔(561-337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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