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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잡이

[여행] 추사 김정희의 애틋한 부부愛, 그 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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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추사 김정희의 애틋한 부부愛, 그 자취를 찾아서

 

한국교직원신문 2013-04-08

 

     제주도 추사유배길 3코스 ‘사색의 길’에 위치한 산방산부근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짙은 꽃향기를 날린다.


"동백이 붉은 것은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 일 것이오"


처가인 아산 외암민속마을 건재고택
주련 속 필체에 아내 사랑 고스란히

8년 3개월 제주도 유배 생활 중
추사체·세한도 등 예술 세계 완성


 ‘어떻게 월로를 불러 저승에 호소하여(那將月老訟冥司) 
   내세에는 그대와 내 자리 바꾸어 태어날까(來世夫妻易地爲)
   나는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서(我死君生千里外) 
   그대로 하여금 이 슬픔을 알게 했으면(使君知我此心悲)’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지 3년 되던 해에 부인 예안 이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다.

수십 통의 한글편지를 보내 병약한 지어미를 걱정하던 57세의 지아비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도망시(悼亡詩)를 지어 슬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추사체와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추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추사고택은 증조부인 김한신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대갓집.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기품을 잃지 않은 단아한 모습이 추사의 성품을 닮았다고 할까.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사랑채가 나그네를 맞는다. 현판과 주련 등 추사의 글로 단장한 사랑채 앞마당의 돌기둥은 해시계의 받침대.

돌기둥에 새겨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아들이 추사체로 쓴 글을 각자했다. 해마다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와 앵두나무 등이 고택의 운치를 더한다.


추사는 15살 때 동갑내기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상처한다. 그리고 23살 때 예안 이씨와 재혼한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추사는 양자를 들여 ‘육십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했다.

두 번에 걸친 10년의 귀양생활과 아내의 죽음으로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추사에게 단란한 가족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추사고택 안채 기둥에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大烹豆腐瓜薑菜)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다(高會夫妻兒女孫)’라는 주련(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귀)이 걸려있는 것도 추사의 가정이 쓸쓸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은 추사를 두고 한 말이다. 추사의 처갓집은 추사고택에서 20여 ㎞ 떨어진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의 건재고택. 우리나라 전통정원 10선에 뽑힐 정도로 정원이 아름다운 건재고택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으로 불리는 외암민속마을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충남 아산의 외암민속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재고택은
추사의 아내인 예안 이씨의 친정으로 추사가 쓴 주련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지금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들어갈 수 없지만 사랑채, 안채, 문간채 등으로 이루어진 건재고택의 기둥에는 주련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하늘을 날아갈 듯 획이 수려하고 파격적인 조형미를 보이는 주련의 필체는 추사의 글씨. 예안 이씨와 재혼한 추사가 처가에 써준 글씨들이다.

하지만 추사는 55세 되던 1840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홀로 한양에서 삼천리나 떨어진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리다 형조참판 시절에 정변에 휘말린 탓이다.

대정읍성에 둘러싸인 추사유배지는 대정골 제일의 토호였던 강도순의 집. 추사가 처음 유배생활을 한 곳은 지금은 터만 남은 인근의 송계순 집이었으나 3년째 접어들던 해에 이곳으로 옮겼다. 안거리(안채), 밖거리(사랑채), 모거리(별채)로 이루어진 현재의 초가집은 고증을 거쳐 1984년에 복원됐다.


서귀포 대정읍에 위치한 추사유배지로 정면에 위치한 모거리(별채)가 추사가 머물던 곳이다.


추사는 8년 3개월 동안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혀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유배생활 중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를 그리는 등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유배지 앞에 위치한 제주추사관은 추사의 작품과 탁본 등을 전시한 공간으로 세한도에 나오는 둥근 창문이 있는 사각형 집을 모델로 삼았다. 


추사는 비록 탱자나무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았지만 대정향교와 안덕계곡은 물론 한라산까지 다녀올 정도로 행동이 자유로웠다.

대정향교가 위치한 단산은 산방산과 함께 제주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화산체.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단산은 인성리에서 보면 추사체로 쓴 ‘山’자를 닮았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대정향교를 오갈 때 대정들녘의 거친 비바람에 살점이 죄다 빠져버려 골격만 남은 단산의 특이한 모습을 보고 어떤 영감을 받았을까.

학자들은 제주도 유배 전의 추사 글씨가 획이 기름지고 두텁고 자신감이 넘치며 윤기가 흘렀다면 유배시절에 완성된 추사체는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말라 대단히 명상적이라고 말한다. 대정향교를 오가며 보았던 단산의 골격만 남은 모습을 보고 추사체를 완성했다는 말은 이래서 나왔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을 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 아래 거름되라고 묻어주었소.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 일 것이오.’


제주도 유배시절에 추사가 아내에게 보낸 한글 편지의 일부다. 금슬이 좋았던 추사는 때로는 편지로 반찬 투정을 하고 병약한 아내에게 약을 챙겨 먹으라고 다짐하는 등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다. 천하의 명필이지만 추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알아보기 쉽도록 일부러 한글로 써 보냈다고 한다.

예안 이씨 집성촌인 외암민속마을에는 30~40년 전 편지를 비롯한 옛 글씨 수천 점이 세 가마니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5대째 연엽주를 만들고 있는 참판댁 주인 이덕선(71)씨는 당시 고문서의 귀중함을 몰라 알아보기 힘든 초서체 편지는 일꾼들이 담배를 말아 피우는 담뱃종이로 쓰였다고 한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고문서는 8년 전 몽땅 도둑을 맞았다. 그 중에는 담배 연기로 사라진 추사의 편지가 한 두 점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인근에 위치한 백송. 수령 200년으로 추정되는 껍질이 하얀 백송은 추사가 중국에서 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추사 가문의 부부사랑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추사고택을 건립한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의 남편.

김한신이 38세로 요절하자 화순옹주는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남편을 따라 죽었다. 조선시대 왕족으로서 유일하게 열녀문을 받은 화순옹주는 추사고택 인근의 구릉에 남편과 합장되어 못다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64세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66세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풀려난다. 그리고 한성판윤을 지낸 부친이 경기 과천에 마련한 과지초당에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다 7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옥녀봉 아래에 위치한 과지초당은 올 5월에 완공되는 추사박물관 건축공사로 자물쇠가 채워진 채 재개장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추사는 살아서 못 다한 부부의 인연을 죽어서 완성했다. 추사고택 옆에 위치한 추사의 무덤은 첫 번째 부인인 한산 이씨와 두 번째 부인인 예안 이씨의 합장묘.

추사의 지극한 부부애를 과시라도 하듯 후손들이 1937년 한산 이씨 묘에 추사와 예안 이씨의 묘를 이장해 합장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추사가 고조부 묘소 앞에 심은 수령 200년의 백송이 추사와 추사의 두 아내를 상징한다는 것.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파견 된 생부를 따라 갔다가 구해온 백송은 본래 가지가 3개였으나 먼저 간 아내들처럼 두 가지는 고사하고 하나만 살아남아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박강섭 국민일보 관광전문 기자



여행수첩


제주국제공항에서 1135번 도로를 타면 제주추사관과 추사유배지가 위치한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까지 곧장 달릴 수 있다.

추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추사유배길은 집념의 길(제주추사관~대정향교 8.6㎞), 인연의 길(제주추사관~서광다원 8㎞), 사색의 길(대정향교~안덕계곡 10㎞) 등 3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제주추사관 064-760-3406).

추사고택은 서해안고속도로 당진IC에서 예산·합덕 방향으로 20㎞를 달리면 나온다. 추사고택 주변에 추사의 묘, 화순옹주 정려문, 백송 등이 있다.
 
예산의 대흥슬로시티는 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진한 형제애를 보여주었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실제 무대로 예당호변에 위치하고 있다. 40㎞에 이르는 예당호 둘레길은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좋다. 예당저수지 주변에는 민물고기를 갈아 만든 어죽과 시래기를 넣어 끓인 붕어찜 전문 음식점들이 많다.

예산 추사고택에서 아산 외암민속마을의 건재고택까지는 약 22㎞. 광덕산과 설화산 자락에 자리 잡은 아산의 외암민속마을은 400년 역사의 충청도 양반촌. 참판댁, 감찰댁, 교수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영암댁(건재고택), 신창댁 등 10여 채의 기와집과 50여 채의 초가집이 처마를 맞대고 있다.

외암민속마을에서는 계절별 농사체험과 그네타기 등 민속놀이, 떡메치기, 마을산책, 한지부채에 그림 그리기, 솟대 만들기, 전통혼례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연중 진행된다(041-541-0848).  

추사가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던 과천의 과지초당은 양재IC에서 약 2㎞. 47번 국도를 타고 과천방향으로 달리다 주암동 체육공원 앞에서 죄회전하면 공사 중인 추사박물관 옆에 과지초당이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