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시간도 멈춰버린 원시의 풍경화, 제주 오름
한국교직원신문 2013-10-28
제주도의 거센 바람을 지휘봉 삼아 억새가 춤을 추는 뒤로 곡선미가 유려해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는 따라비오름이 보인다.
하늘 · 바람 · 억새 … 제주의 풍광을 다 품다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빛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제주도의 초원과 오름을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작가 김영갑은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황홀한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고 고백했다. 김영갑이 죽는 날까지 중산간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존재는 바로 오름이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섬처럼 흩뿌려져 있는 368개의 오름은 화산활동으로 태어난 기생화산으로 생명탄생의 공간이다. 마소가 오름에서 태어나고 사람이 오름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봄에는 형형색색의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하얀 억새꽃이 장관을 이루는 오름은 그래서 제주도의 모든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원시의 오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다. 계절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순식간에 모습을 달리하면서 삽시간의 황홀을 연출한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러운 능선과 분화구에 빛과 그림자가 생겨나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 꿈틀댄다.
거대한 용이 누운 모습 ‘용눈이오름’
‘오름의 왕국’으로 불리는 한라산 동쪽 중산간에서 오름과 억새가 만나 정겨운 풍경화를 그리는 곳은 용눈이오름. 세 개의 봉우리와 세 개의 분화구, 그리고 두 개의 알오름으로 이루어진 용눈이오름은 이생진 시인과 김영갑 작가의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곳이다.
이생진 시인은 ‘김영갑 생각’이라는 시에서 “그대는 가고 ‘숲 속의 사랑’은 다시 세상에 나와 바람과 햇살 사이로 그대가 걸어오는 듯 나뭇잎이 흔들리네.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던 어느 날, 날더러는 감자 밭에서 시를 쓰라 하고 그대는 무거운 사진기를 짊어지고 사라졌지”라고 추억했다.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가을의 용눈이오름은 능선을 수놓은 하얀 억새꽃이 인상적이다. 돌담에 둘러싸인 산담을 지나 능선에 서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거센 바람이 한라산과 바다에서 불어온다. 능선에 납작 엎드린 하얀 억새가 연신 비명을 지른다.
정상에서 보면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누워있는 형상의 용눈이오름은 이웃의 다랑쉬오름을 비롯해 한라산, 우도, 성산일출봉 등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지는 포인트. 능선과 분화구의 선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지만 태양이 기울면 선을 경계로 강렬한 빛과 그림자가 ‘삽시간의 황홀’을 연출한다.
4·3사건 아픔 묻어 있는 ‘다랑쉬오름’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길에 한 무더기씩 피어있는 억새꽃의 몸짓은 진혼무(鎭魂舞)를 닮았다. 1948년의 4·3사건으로 전소한 ‘잃어버린 마을’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일까. 인근의 다랑쉬굴에서 4·3 희생자 유골 11구가 발견되었다는 검은 표석이 아니더라도 묵은 집터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억새꽃이 그날의 아픔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월랑봉으로도 불리는 다랑쉬오름은 높이 277m로 남서쪽의 높은오름(405.3m)에 이어 이 일대에서 가장 높다. 깔때기 모양의 원형 분화구는 백록담 깊이와 비슷한 115m. 정상에 서면 아끈다랑쉬오름과 용눈이오름, 따라비오름 등 인근의 오름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랑쉬오름 동남쪽에 이웃한 아끈다랑쉬오름의 자태는 비바리 해녀처럼 수수하다. ‘아끈’은 제주 방언으로 ‘작은’ ‘버금’의 뜻. 이생진 시인이 매년 4월 4·3사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시낭송회를 개최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아끈다랑쉬오름은 능선을 수놓은 억새꽃의 실루엣이 멋스럽다.
패러글라이딩 즐기기 좋은 ‘높은오름’
송당리에서 동남쪽으로 1.5㎞ 지점에 위치한 높은오름은 능선미가 단아하고 유려한데다 구좌읍 중앙에 위치해 뭇 오름을 압도한다. 인근의 다랑쉬오름과 함께 행글라이더와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입구까지 늘어선 삼나무터널은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좋다.
하지만 여느 오름과 달리 높은오름은 구좌읍 공설묘지를 관통해 올라야 하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가파른 숲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면서 중산간 초원 위로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과 따라비오름 등 수십 개의 오름이 섬처럼 불쑥불쑥 솟아 황홀경을 연출한다. 오름군 뒤로는 멀리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아스라하게 보인다. 공동묘지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약 20분.
군데군데 국수나무 찔레나무 쥐똥나무 청미래덩굴 등 키 작은 관목이 군락을 이룬 능선을 올라 정상에 서면 억새가 제주도의 거센 바람과 함께 쉼 없이 춤을 추고 보랏빛 야생화들은 그 사이에서 수줍은 듯 납작 엎드려 있다. 고개를 돌리면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지인 아부오름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거문오름 너머로 한라산이 구름 속에서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순간 높은오름 분화구에서 솟아났는지 구름 속에서 내려왔는지 패러글라이더 한 대가 불쑥 나타나 높은오름 상공을 몇 차례 순회하더니 다랑쉬오름으로 하늘여행을 떠난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원시의 오름이 장관을 이루는 순간이다.
유려한 능선 빼어난 ‘따라비오름’
여섯 개의 봉우리와 세 개의 원형분화구, 그리고 아름다운 능선으로 이루어진 따라비오름은 ‘오름의 여왕’으로 불린다. ‘따라비’라는 이름은 모지오름에 이웃해 있어 마치 지아비와 지어미가 서로 따르는 모양이라 이름 지어졌다. 따라비오름은 생김새도 색다르다. 크고 작은 봉우리가 오밀조밀 어우러진 데다 부드러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비오름에선 억새의 키와 바람의 세기가 반비례한다. 바람이 약한 오름 하단은 억새가 어른 키보다 크지만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져 정상에는 아예 잡초들만 무성하다. 발아래 원형분화구를 가득 채운 억새만이 일엽편주처럼 거센 바람에 몸을 맡긴다.
따라비오름과 억새가 어우러진 모습은 주차장 옆 들판에서 볼 때 가장 감동적이다. ‘송이’로 불리는 붉은색의 퍼석퍼석한 화산재 알갱이가 깔린 산책로를 중심으로 이생진 시인의 시처럼 ‘죽은 상태로 살아 있는 억새’가 들판을 이루고 있다. 붉은 흙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억새는 육지와 달리 붉은 기운이 감돈다. 억새밭에서 보는 따라비오름은 한 폭의 그림.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억새밭 너머로 한라산과 오름군이 걸개그림처럼 걸려있다.
석양에 아름답게 빛나는 ‘산굼부리’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은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산굼부리 분화구의 동쪽 기슭. 천연기념물 제263호인 산굼부리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로마의 원형경기장처럼 둥글다. 제주도의 오름 중 유일하게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 없이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수천 평 넓이의 산굼부리 억새밭은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에 가장 아름답다. 금발의 여인이 머리카락 휘날리며 말을 달리듯 황금색으로 물든 억새꽃이 들판 가득 출렁인다. 그러나 태양이 한라산 봉우리와 입을 맞추는 순간 금발은 은발로 변한다. 이윽고 해가 한라산 뒤로 가라앉으면 산굼부리 억새는 마지막으로 실루엣을 연출하며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박강섭 국민일보 관광전문기자
여 행 수 첩
◆ 가는길
오름 주위에는 특별한 건물 등이 없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렌트카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제주공항에서 출발한다면 산굼부리,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따라비오름 순으로 방문하면 동선을 줄일 수 있다. 억새는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가 가장 아름답다. 오름 정상에 서면 바람이 강하므로 바람막이 재킷 등으로 보온에 신경을 써야 한다. 오름의 억새 사진을 촬영하려면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이 좋다.
◆ 볼거리
- 포시 성산읍 삼달리에 위치한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은 제주의 바람과 돌과 자연을 자신의 몸보다 더 사랑했던 사진작가 고 김영갑 씨의 작품사진을 만날 수 있는 곳. 고인이 손수 실어 나른 돌과 나무들로 꾸며진 정원을 지나면 단층 짜리 폐교를 개조해서 만든 아담한 갤러리가 나온다. (064-784-9907)
- 제주시 조천읍의 거문오름 입구에 위치한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는 제주도의 생성과 화산활동역사, 동식물 등 자연환경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전시관. 상설전시실에는 제주의 숨겨진 풍경을 비롯해 화산섬 제주도와 한라산의 탄생 과정, 한라산과 용암동굴의 지질 구조 및 지형,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등이 재현되어 있다. (064-710-8981)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이달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제주올레 14~16코스에서 ‘2013 제주올레 걷기축제’를 개최한다. ‘나누자, 이 길에서!’를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축제는 하루 한 코스씩 걸으며 올레꾼과 올레길이 지나가는 마을 주민과 함께 즐기는 참여형으로 꾸며진다.
◆ 먹거리
최근 제주도에서는 블랙푸드 바람이 불고 있다. 블랙푸드는 검은콩, 검은깨, 검은쌀, 메밀, 김, 다시마 등 검은색 식품으로 블랙푸드의 안토시아닌 성분은 체내활성산소를 효과적으로 중화시켜 심장질환과 뇌졸중, 성인병, 암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문오름 주변에 위치한 조천읍 선흘리의 블랙푸드촌에서는 다양한 블랙푸드를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오름나그네(064-784-2277)는 검정콩버섯칼국수를 비롯해 보말칼국수(사진), 검정콩뽕잎들깨수제비 등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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