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남 담양 오방길, 한국의 슬로시티를 찾아서
한국교직원신문 2013-08-26
담양 오방길을 대표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아침 햇살에 젖어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담양군은 메타세쿼이아를 보호하기 위해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흙길로 복원했다.
자박 자박 걸으며, 느림의 미학을 만나다
걷는 길에도 품격과 운치가 있다. 성근 대숲에서 은은한 죽향과 다향이 묻어나는 대숲 길과 들일 나갔던 촌로가 굽은 등에 해를 짊어지고 긴 그림자를 지팡이 삼아 자박자박 걷는 돌담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오방과 오행을 기초로 자연과 사람, 마을과 문화가 어우러진 전남 담양의 ‘담양 오방길’은 품격 있는 스토리가 흐르는 길로 한 편의 시이자 한 폭의 수묵화나 다름없다.
자연·문학 어우러진 선비의 길
가사문학의 산실이자 죽향골로 이름난 담양에서도 지실마을, 소쇄원, 한국가사문학관, 식영정 등 담양의 누정을 연결하는 길은 자연과 문학이 하나 되는 선비의 길이다.
송강 정철(1536~1593)의 고향이기도 한 지실마을은 방 얻으러 갔던 나희덕 시인을 애타게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인은 ‘방을 얻다’라는 시에서 고택의 빈방을 세놓으라는 제의에 주인아주머니가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맘으로는 늘 안채를 쓰고 있다”고 답하자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는 이미 그 방에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허물어진 돌담과 사철 푸른 대숲은 지실마을을 상징하는 아이콘. 청량한 바람 소리를 머금은 대숲은 푸르다 못해 검은빛을 띠고 돌담을 수놓은 초록 이끼는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짙다. 좁은 골목길의 모퉁이를 돌다 맞닥뜨리는 촌로와 송강 정철의 환영이 오버랩 되는 것은 지실마을의 매력.
명옥헌 원림에 뿌리를 내린 배롱나무와 식영정의 노송은 가사문학을 상징하는 나무. 송강 정철이 머물던 곳으로 ‘성산별곡’의 탄생지인 식영정은 광주호 옆 야트막한 야산의 노송 그늘에 위치하고 있다. 식영정은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뜻으로 노송 사이로 광주호가 펼쳐진다.
조선시대 별서정원의 대명사로 꼽히는 소쇄원의 대숲 길은 사뭇 시적이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입구부터 50m 길이의 대숲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너무 짙어 어둑어둑한 대나무 터널은 참새들의 보금자리. 나그네 발걸음에 놀란 참새가 어지럽게 날아오르는 대숲은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1503~1557)가 500년 후의 나그네를 위해 마련한 퍼포먼스.
소쇄원의 하이라이트는 제월당과 광풍각.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霽月堂)은 서재로 주인의 성품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풍류가 스며있다. ‘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의미의 광풍각(光風閣)은 주인이 소쇄원을 찾은 벗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공간. 누마루에 앉으면 녹음 속을 흐르는 계류가 글 읽는 선비의 목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린다.
슬로시티로 유명한 창평면의 삼지천마을은 싸목싸목 걷기에 좋은 길로 ‘싸목싸목’은 ‘천천히’를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 정겨운 돌담길을 따라 실개천이 흐르는 삼지내마을은 500년 역사의 창평 고씨 집성촌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냈던 고경명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고정주 고택을 비롯해 고재선 가옥, 고재환 가옥 등 1900년대 초에 건축된 한옥 20여 채가 고즈넉한 풍경화를 그린다.
삼지내마을을 포함한 창평면은 한때 천석꾼이 6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부촌이었지만 지금은 여느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낙들은 텃밭에서 호박잎이나 고추를 따서 밥상을 차리고, 들일하던 촌로들은 마을 정자인 남극루에서 한낮의 더위를 피해 정담을 나누는 등 낯익은 풍경을 연출한다.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3.6㎞ 길이의 돌담길을 느릿느릿 걷다 보면 이곳이 왜 슬로시티로 지정됐는지 짐작하게 된다.
청량감 가득한 대나무 숲
성인산 자락에 조성된 죽녹원에서 관방제림을 거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멋스런 구간은 담양을 대표하는 도보여행길. 대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이온과 푸른 기운이 송강 정철의 시구처럼 생생한 죽녹원은 사철 초록빛이 완연하다. 죽녹원은 모두 8개의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 산책로인 440m 길이의 운수대통길을 비롯해 죽마고우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추억의 샛길 등 2.2㎞의 산책로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분죽, 왕대, 맹종죽 등 다양한 종류의 대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죽녹원은 댓잎이 일렁일 때마다 비집고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로 인해 대숲은 환희의 공간으로 변신한다. 대숲에서 경험하는 죽림욕의 청량감은 산이나 바다와 비교할 바 아니다. 대숲은 다량의 음이온을 발산할 뿐 아니라 푸른 댓잎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 한여름에는 바깥 온도보다 4∼7도 정도 낮아 더욱 시원하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어찌 그리 곧고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며 대나무를 칭송했다. 속을 비운 대나무의 무욕과 곧은 심성을 가진 대나무의 미덕은 선비정신과 다름없다. 시인 신석정이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고 외친 이유도 대숲은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마저 청량하게 여과시키는 선비의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흙길로 복원된 가로수길
담양을 대표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배달 사고로 탄생했다. 1970년대 초에 전국적으로 가로수 심기 사업이 한창일 때였다.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할 메타세쿼이아 묘목이 담양으로 잘못 실려 왔다. 메타세쿼이아는 당시 흔한 수종이 아닌데다 값비싼 나무라 담양군에서는 되돌려 보내지 않고 담양군청에서 금성면 원율리까지 24번 국도가 지나는 8.5㎞ 구간에 1500여 그루의 메타세쿼이아 묘목을 심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2001년 영화 ‘와니와 준하’에 소개되면서 인기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드라마 ‘여름향기’를 비롯해 온갖 영화와 CF가 경쟁적으로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배경으로 삼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의 첫 장면을 장식한 후에는 관광객도 두 배로 늘었다. 우연한 배달 사고가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높이가 26m나 되는 메타세쿼이아는 화석식물로 불리는 신생대의 나무. 지구가 습하고 따뜻하던 시절에 북반구에 널리 분포했었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메타세쿼이아는 1941년 중국 양쯔강 상류에서 발견돼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아득한 옛날에 공룡과 함께 살던 거대한 나무가 우여곡절 끝에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 아름다운 가로수 길의 일부가 사라질 뻔 한 적도 있었다. 24번 국도 확장공사로 600여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이 나서 도로 노선을 변경시켰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가장 아름다운 1.8㎞ 구간은 차량 통행도 금지시키고 아스팔트도 걷어내 걷기 좋은 흙길로 복원했다.
음지와 양지가 교차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걸어 담양천에 이르면 길은 2㎞ 길이의 관방제림 둑길과 연결된다.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조선시대에 홍수를 막기 위해 담양천에 둑을 쌓으면서 조성한 방풍림. 수령 200~300년인 푸조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벚나무 등 아름드리 고목 수백 그루가 명찰을 달고 있다.
유려한 곡선의 금성산성
‘담양 오방길’ 중 가장 가파른 구간은 금성산성을 오르는 길. 담양호에 발을 담근 산성산(603m)의 봉우리를 따라 등고선을 그리는 금성산성은 남성미와 여성미가 혼재된 산성이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과 7345m 길이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금성산성의 출입문은 남문으로 새의 부리처럼 튀어나온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장성 입암산성, 무주 적상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는 금성산성은 천혜의 요새. 노적봉 철마봉 운대봉 등 암벽으로 이뤄진 경사면에 돌을 쌓아 유려한 곡선의 성곽을 만들었다. 정유재란 때는 2000명의 군사가 숨지고, 산성에서 배수진을 친 동학군은 압도적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전멸되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남문인 충용문에서 노적봉과 철마봉을 거쳐 서문에서 보국사터를 거쳐 다시 충용문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트레킹 코스로 유명하다. 노적봉의 천년송 앞에 서면 하늘을 닮아 더욱 푸른 담양호와 추월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멀리 무등산과 지리산의 윤곽도 더욱 선명하다.
박강섭 국민일보 관광전문기자
여 행 수 첩 ( 지역번호 061)
◆가는길
- 88올림픽고속도로 담양IC에서 구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10분쯤 달리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다.
- 도보와 자전거로 즐기는 ‘담양 오방길’은 담양읍의 죽녹원과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중심이 되는 1코스 ‘수목길’ 8.1㎞, 담양리조트와 금성산성을 연결하는 2코스 ‘산성길’ 10.5㎞, 담양습지가 중심이 되는 3코스 ‘습지길’ 5.2㎞, 슬로시티 삼지내마을의 돌담길과 상월정을 잇는 4코스 ‘싸목싸목길’ 7.2㎞, 그리고 죽녹원에서 송강정과 소쇄원을 거쳐 독수정원림까지 가는 5코스 ‘누정길’ 32㎞이다.
◆볼거리
- 담양읍 운교리의 담양대나무숯가마체험장(381-6800)은 전국 유일의 대나무숯가마로 황토로 만든 숯가마에서 대나무를 고온으로 구울 때 나오는 원적외선과 음이온을 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 담양읍내에 위치한 대나무건강랜드(383-0001)는 전국 최초로 대나무 잎을 이용한 기능성 온천. 1일 수용인원 5000명으로 대중탕을 비롯해 보석불가마찜질방, 대나무산소방, 참숯황토방, 옥냉방, 가족온천탕, 헬스클럽 등을 갖추고 있다.
- 금성면 원율리의 담양리조트온천(380-5111)은 가족호텔로 게르마늄 성분을 함유한 온천수로 유명하다. 대나무숯사우나와 댓잎탕 등 대나무의 효능을 이용한 탕이 이색적이다.
◆먹거리
- 담양의 으뜸 별미인 한우 떡갈비는 인절미를 빚듯 뼈를 발라낸 후 다진 갈빗살에 간장, 배즙, 양파즙, 청주, 설탕, 참기름 등으로 만든 양념장을 구우면서 바르거나 하루 정도 재어서 굽는다.
- 죽통밥으로 불리는 대통밥(사진)은 대나무에 멥쌀, 찹쌀, 흑미 등을 넣고 찐 영양밥으로 3년 이상 자란 왕대의 대통을 이용한다.
- 죽순요리와 돼지숯불갈비, 담양국수, 담양 한정식도 담양을 대표하는 별미.
- 창평 국밥으로 유명한 창평 오일장은 끝자리가 0과 5일인 날에 열린다.
◆잠자리
- 선비의 고장답게 담양에는 한옥체험마을이 많다. 죽녹원 옆의 죽향문화마을은 송강정, 면앙정, 식영정, 광풍각, 명옥헌 등 담양의 정자를 재현한 곳으로 숙박이 가능한 한옥 3채에 5개의 방이 있다. 숙박료는 방 크기에 따라 8만~22만 원. 팬션 개념으로 지은 한옥에 화장실과 샤워실은 물론 싱크대도 갖추고 있다.
- 삼지내 마을에도 ‘매화나무집’과 ‘한옥에서’ 등 한옥체험 집이 몇 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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