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부회, 발길 닿는 대로 가다.
3부. 사문진나룻터, 그 역사의 현장
■ 언제 : 2015. 10. 31.(토)
■ 어디로 : 대구수목원, 마비정벽화마을, 사문진나룻터, 강정고령보 디아크(3부 : 사문진나룻터)
■ 누구랑 : 여섯부부
沙門津(사문진) 나루터
<펌>디지털고령문화대전 홈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번 :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744-202
[개설]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마을은 조선 인조 때 개척되었는데, 낙동강 범람으로 인해 늪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 ‘늪마을’이라 하다가 120여 년 전 이씨라는 선비가 들어와 마을 앞 큰 호수를 보고 ‘호촌’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낙동강이 범람할 때 이곳 흙을 많이 훑어갔다고 ‘훑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06년(고종 43) 고령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천동, 사동, 사문(沙門), 사문(寺門)이라 하였다. 사문(沙門)은 낙동강 홍수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어 호촌2리에서 모래를 거쳐 배를 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큰 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문(寺門)이라고도 불려졌다.
[변천]
사문진나루터는 조선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나루였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나루터가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 17)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문진나루터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왜에서 이입된 물품을 보관하는 화원창(花園倉), 왜물고(倭物庫)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에 폐쇄되었다. 하지만 사문진나루터는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조선시대 대소비지 대구를 대상으로 하는 남해안의 돛단배나 범선의 입출항이 잦았는데, 주요 운송 해산물로는 소금, 미역, 김, 어물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 바로 사문진나루터였다. 1901년 5월 이른 아침 피아노 1대가 어설프게 포장되어 인부 3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신기해 하였다.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나루터를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는데, 당시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20만 석, 콩 10만 석, 우피 40만 근과 그 밖의 잡곡, 양재, 잡화 등과 소금 10만 석, 석유 3만 5,000상자, 성냥 6,000상자, 옥양목 6만 단, 무명 10만 단, 방적사 1,000가마와 그 밖의 견, 면직물류, 약재, 잡화 등이다. 이것들의 약 5분의 2가 대구 시장을 통해 분산 소비되었고, 나머지 5분의 3 정도는 대구를 중계지로 하여 대부분 낙동강을 통해 부산 및 상류 각지로 수송되었다.
이 밖에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 운영권은 주로 입찰로 정해졌고 승객 대부분은 서쪽 고령군 다산면 주민들이었다. 도선은 처음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이었으며, 이후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였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철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도 10t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고령과 달성을 오갔다. 당시 하루 평균 100여 대의 차량과 1,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마을 사람이면 1년에 벼 1말 5되 정도를 선주에게 지불하고, 일반인은 1인당 500원, 중학생 이하는 무료였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 시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다.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유원지도 유명해졌다.
철도 개통 후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사문진교 준공과 동시에 한여름 나루터 근처 모래사장을 찾던 피서객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사문진 주막촌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40-12 (화원읍)
사문진은 과거 경상도 관아와 대구지역 일원에 낙동강 하류로부터 유입되는 물산운송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낙동강의 대표적인 나루터였다. 1900년 3월 26일 미국선교사 사이드 보탐에 의해 그 당시 “귀신통”이라 불린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유입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스토리텔링하여 달성군에서는 2012년부터 매년 피아노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1932년 일제 강점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촬영지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주막촌에서는 막걸리를 비롯해 잔치국수, 국밥, 부추전, 두부 등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고 있어 옛 정취와 함께 사문진 낙조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으며, 사문진 나루에서는 낙동강 최초의 유람선과 나룻배를 운항하고 있다.
3부. 沙門津(사문진) 나루터에 오니 회한이 밀려온다.
사문진 나루터는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조선 전기부터 근・현대가 교차하는 시점까지 물류운송 수단의 중요한 요충 역할을 했다.
지금은 달성군과 고령군을 잇는 사문진교의 등장으로 도선의 기능이 퇴색되어
물류운송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화원유원지가 조성되어
대구・경북 지방의 시・도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곳이기도 했다.
사문진 나루터는 내겐 너무나 특별한 곳이다.
마비정벽화마을을 떠나 사문진 나루터로 출발하면서
이미 난,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회한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내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놓은 내가 안고 가야할 그 무엇이
나를 동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사문진교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을 넋 놓고 바라보며
역류하는 가슴 속 소용돌이를 진정시킨 후 댓바람에 갈대만을 응시한다.
이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람선은 강물을 거슬러 강정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사문진 주막촌에 들어서면 거대한 노거수 한 그루가
마치 사문진을 대표하는 역사 인냥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바로 500년 세월을 묵은 팽나무가 그것이다.
오랜 세월을 버틴 만큼 팽나무의 나이테 하나하나에
사문진의 역사와 세월이 화석이 되어 묻혀 있을 것이다.
팽나무 옆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다.
무엇인고 하니 ‘귀신통 납시오’라 적힌 피아노 모양의 조형물이다.
그 옛날 이 나루터로 우리나라 최초로 피아노가 유입된 나루터임을
고증하기 위해 역사의 상징으로 형상화 해 놓았다.
사문진에 오면 꼭 봐야할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위에 나열한 사문진의 역사를 이고 있는 500년 묵은 팽나무와
‘귀신통’이라 불리기도 한 피아노 조형물
그리고 나루터다.
이 세 가지는 사문진의 대표성을 띤 역사라 가름해도 무방한 만큼 꼭 봐야 한다.
당초 우리 일행은 사문진에 오면 유람선을 타리라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굳이 유람선까지 탈 필요를 느끼지 못해
유람선을 타려던 계획은 졸지에 무산되고 말았다.
12명이 타려면 가격도 만만찮다.
그래서 우리는 비용도 아낄 겸 주막촌과 나루터 주변을 거니는 것으로 대신했다.
강가에는 아직 코스모스가 줄지어 늘어졌고 주차장 아래는 갈대밭이 서정적인 풍경으로 밀려온다.
행사장 주변과 나루터 주변을 거닐다 우리는 갈대가 나부끼는 곳으로 갔다.
코스모스와 어우러진 나루터 풍경도 좋았지만,
역시 인위적이 아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갈대숲 풍경이 더욱 정겹다.
강바람 따라 갈대밭을 거닐다 아내랑 난 잠시 함께 걷던 일행들과 떨어지기 위해
일부러 늦장 걸음을 걸으며 아내한테 귓속말을 했다.
내 말을 듣던 아내가 깜짝 놀라며 ‘여기가 거기였냐고 되묻는다.’
아내와 난 말없이 기도를 했다.
여기는 개인적으로 또 다른 슬픔이 있기도 한 곳이다.
차제에 그 슬픔까지 기도를 한다.
갈대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가을 풍경
유유히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람선의 낭만적인 모습
강가를 거니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가을 낭만과 잘 어울리는 곳
그곳은 바로 내 고장 가까이 있는 사문진 나루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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