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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방

금강산 건봉사 외 백팔사찰순례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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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사찰 탐방, 금강산 건봉사, 진전사, 동해사

 

 

언제 : 2015. 7. 26.(일)

 

어디로 : 강원도 금강산건봉사, 진전사, 동해사

 

누구랑 : 불교대학 108사찰순례 동행(수화니 님 부부 동참)

 

 

 

흔적

 

아내가 다니는 불교대학에서 강원도 일대의 이름난 사찰을 중심으로 108사찰순례를 떠난다. 사찰순례는 처음이었지만, 산행은 심심치 않게 동참했던지라 이제 절에서 운영하는 산행과 사찰순례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 어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참가하는 김에 개인적으로 접견하기에는 너무 먼 곳이고,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 주변 지인에게 권했더니 수화니 님 부부가 동참을 하려 했다. 교회에 몸을 담고 있지만종파를 초월한 마음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오늘 우리가 사찰순례 차 탐방하는 절은 강원도 고성의 민간인 통제구역에 있는 금강산 건봉사와 양양에 있는 진전사 그리고 한국근본불교의 성지 동해사란 절이다. 대구에서 강원도 최첨단까지 아침 7시에 출발하여 10시쯤 도착하는 당일 일정으로 진행하니 탐방길은 아마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중앙고속도로에 차가 오르자 예외 없이 목탁을 두드리며 직접 육음으로 기도를 한다. 저 기도가 마치면 아마 차는 안동휴계소에 도착하리라. 예측이 거의 맞아 떨어졌다. 기도가 끝나니 차는 안동휴게소로 들어가고 있다. 절 산악회에 동참할 때도 그랬지만, 절에서 운영하는 행사에 참가하면 비록 먼 길이라 하더라도 오가는 길이 덜 지겹다. 갈 때마다 그리 느낀다.

 

그래도 먼 길은 먼 길이다. 왜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건봉사는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사찰이니 당연 멀 수밖에... 그래도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와 첫 번째 목적지인 건봉사에 당도했다. 건봉사는 오늘 사찰순례의 꽃이라 봐야 한다. 예전에는 민통선 안에 있어 신분 확인을 거친 후 군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을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는 민통선이 개방되어 누구라도 탐방이 가능하게 되었다.

 

주차를 하고 내리니 혈색 좋고 큰 기를 자랑하는 쭉 뻗은 소나무가 먼저 보인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다. 한 두 그루가 아니다. 적당히 군락을 이루며 금강산 건봉사란 절에 걸맞게 초입부터 길쭉하게 늘어서 호위를 하는 것 같다. 건봉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일주문이 떡 버티고 섰다. 불이문이다.

 

불이문은 1920년에 건립되었으며, 전쟁 중에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건물로 다포 양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특이하게 4개의 기둥으로 건축되어 있다. 보통 2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다른 사찰과 다른 특이한 점이다. 불이문의 돌기둥에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금강저가 음각되어 있는데 그것은 천왕문을 따로 건립하지 않고 불이문이 사찰 수호의 기능까지 더 함을 의미한다. 불이문의 편액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 단아하면서도 힘이 가득 들어 있다. 해강 김규진은 주로 사찰 편액에 적힌 글을 많이 썼으며, 18세 되던 1885년에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을 하였고,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던 인물이었다.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로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지역이 고성이고 사찰 이름 앞에 금강산이 붙었기에 난, 80년대 초 내가 군생활을 했던 민통선 너머 명파라는 마을 근처 통일전망대 부근에 있는 줄 알았다. 이번에 함께 동참하면서 군생활의 추억도 더듬을 겸 그쪽이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내가 원하는 쪽은 아니었다.

 

금강산 건봉사 진신사리탑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와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게 되었다. 당초에는 치아사리가 12과였는데 도굴을 당해 사리 4과는 아직 행방이 묘연하고, 꿈에 부처님의 꾸짖음을 들은 도굴꾼이 겁이 나 되돌려 준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는 아쉽게도 현재 8과만 현존하고 있다.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사리탑에, 나머지 5과는 법당에 봉안하여 참배불자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한다. <건봉사 홈 내용 참조>

 

우리나라는 5대적멸보궁을 비롯해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찰은 더러 있으나 건봉사처럼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없다고 한다. 더구나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사명대사가 봉안한 사실이 분명하여 그 가치가 더욱 높고, 치아사리는 전 세계에 15과 뿐 인데 건봉사에 12(현재 8) 스리랑카(불치사)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전해진다. <건봉사 홈 참조>

 

그러니까 오늘 우리 일행은 건봉사라는 예사롭지 않은 절을 순례 차 온 것이다. 부처님 치아진신사리8과를 봉안한 절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불이문 옆에 수령 500년 묵은 노거수인 팽나무가 있다. 전란 때 불이문 곁에서 유일하게 수호신 역할을 한 나무다. 불이문을 수호한 노거수에게 가볍게 예를 표하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아치형의 능파교를 지나 금강산건봉산이란 편액이 적힌 봉서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오른쪽에 명부전과 만일염불원이 있다. 만일염불원 안에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5과가 봉안되어 참배객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찍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어 눈으로 보고 가슴속에 담기만 했다. 그리고 만일염불원 위로는 명부전이 있는데 명부전에는 전쟁 때 나라를 지키며 운명을 달리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1,238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산 자 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넋도 평온하게 지켜 드려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 불교라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건봉사를 다녀온 후 케이블 TV진부령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본 내용이다. , 명부전에 들어가지 않아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등공대 가는 길이 있다. 인적이 없고 우리 일행도 간 것 같지 않아 대웅전을 나와 적멸보궁으로 갔다. 등공대 가는 길이 적멸보궁쪽으로 또 있나 싶기도 해 일단 적멸보궁은 아니 갈 수 없기에 그쪽으로 먼저 갔다. 적멸보궁 뒤로 안치된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적멸보궁을 돌아 사리탑 앞에서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만일염불원에서 5과를 친견하고 나머지 3과를 또 친견했다. 그러니까 전세계적으로 스리랑카에 있는 3과와 도굴범으로 인해 행방이 묘연한 4과를 제외한 나머지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는 모두 친견한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절이래야 아내 따라 갓바위와 어쩌다 절 산악회에 동참하는 수준인 내가 이런 귀한 경험을 하다니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산에 다니며 5대적멸보궁 중 강원도 영월에 있는 사자산 법흥사를 제하고 4대 적멸보궁을 다녀왔으니 결례를 무릎 쓰자면, 웬만한 불자보다는 내가 더 많이 본 지도 모른다.

 

적멸보궁 쪽은 등공대로 가는 방향이 아니다. 좀 전에 대웅전이 있는 곳에서 등공대 가는 표식이 있는 그 길인 모양이다. 아내와 난 등공대를 가기 위해 다시 대웅전으로 갔다. 등공대 가는 길은 대웅전에서 약 2km 남짓한 거리에 있다. 약간 오르막이긴 해도 꼭 가야할 곳이다. 거기를 가야 이번 행사에 혼자 속으로 욕심내며 따라 나섰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 먼 길을 따라 나섰을 때 나는 실은 절만 보러 나선 길이 아니었다. 강원도 깊숙한 곳에서 자생하는 아랫동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야생화와 나무를 보고 싶어 따라 나섰던 것이다. 풀과 나무를 찍기 위해 어떻게 이 먼 길을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실로 실행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등공대 가는 길 중간쯤 왔나. 철제로 폐쇠한 문이 있는 곳까지 왔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다. 저 문을 통과하려면 예전에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열쇄로 문을 따고 드나들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내가 문제가 생겼다. 빨리 화장실을 가야할 신호가 와 버린 것이다. 참고 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그냥 내려가 버렸다. 오늘 행선지 중 유일하게 금강산 건봉사에 있는 등공대에 올라야 북녘 땅을 바라보고, 금강산이 그리는 마루금도 아득하나마 바라볼 수 있는데 생체 리듬이 괴팍하여 내 입장에서는 그만 제일 큰 볼거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등공대에 올라야만 비로소 각종 야생화를 보여준다는데 아쉽고 또 아쉽기만 하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잿밥에만, 눈독을 들인지라 부처님께서 용납을 하지 않으신 모양이다. 그리 생각하고 다음 코스인 진전사로 이동 했다. 고성에 있는 건봉사에서 양양에 있는 진전사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걸렸다.

 

진전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821. 신라 선종의 종조(宗祖)이자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며,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선사가 체발득도한 선종의 대본찰이다. 그러니까 진전사는 신라불교에 있어 그 시작을 의미함과 다름없으니 오늘 건봉사에 이어 두 번째로 귀한 사찰을 탐방하는 즐거움을 갖는다.

 

진전사로 오는 길에 국보 제122호인 진전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차창너머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었으나 모두 내려 구경할 짬이 없으니 이동 중에 기사님의 설명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진전사에는 보물 제439호인 진전사지 부도가 있다. 진전사지 부도는 도의국사의 부도로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부도(9세기 중반)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진전사에서 난 사찰 구경과 진전사지 부도를 접견한 후 홀로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지대가 높아 숲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뭔가 보여줄 것 같았다. 동자꽃이 보이더니 여뀌류가 보이고 여기는 뭔가 있겠다 싶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조금 조금씩 안으로 더 들어갔다. 분명히 뭔가 보여 줄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데 숲속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잡풀만 우거지고 보고 싶은 애들은 도통 고개를 내민 애들이 없다. 그 참 시간을 더 끌 수도 없고, 아내의 전화 오는 소리를 들으니 별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만 했다. 역시 염불에는 관심없고 잿밥에만 눈독 들여 부처님의 가피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건봉사에 이어 두 번째 진전사 순례를 마치고, 마지막 코스인 동해사로 갔다. 동해사 역시 양양 어느 지역에 있었다. 동해사는 적당히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비교적 아담한 사찰이었다. 동해사 어귀에 한국근본불교 조계종이란 안내판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도 아니고 처음에는 안내판의 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동해사에 대한 내용을 요약한 안내판에는 감로법우성지 동해사란 제목으로 대한불교 삼론종 지정 성지 제1호로 표기되어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난해하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색을 해보니 대한불교 삼론종은 현재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활동하는 한국불교 27개 종단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러니까 대한불교 조계종은 아닌 것 같다.

 

동해사는 자작나무에서 떨어지는 감로수로 인해 일약 유명해진 사찰이었다. 10월에서 11월 사이에 감로비가 떨어지는가 하면 오색무지개가 나타나 부처님의 모습을 보이시고, 그 무지개는 불탑사 부처님께 연결되고 그곳에 다시 쌍무지개가 떠 설악산 달마봉에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화우(火雨)가 떨어져 참배객이 환호를 지르는 현상도 나타났다고 하니 실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절이다.

 

더구나 감로수가 나오는 약수 옆에는 영천 돌할매처럼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돌도 있다. 우리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빌며 돌을 들어본다. 대부분 쉽게 들리는가 하면 어쩌다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연세가 지긋하신 할매와 딸인 두 모녀는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돌이 들리지 않는다. 뭔지 모르지만, 두 분의 애틋한 기도가 서로 통했나 보다. 노모의 딸은 감동에 겨웠는지 눈에서 눈물이 절로 흐른다. 괜히 보는 내가 가슴이 저민다. 뭔지 모르겠지만, 꼭 소원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돌이 쉽게 들린 사람도 실망하지 않도록 소원을 모두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괜히 들었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 영천돌할매한테 갔을 때도 돌을 들지 않았다. 여기서도 그랬다. 안 들리면 좋겠지만, 들려 버리면 괜히 기분이 찜찜할 것 같아 아예 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내도 몇 번 들더니만, 그냥 쉽게 쑥 들려버린다. 아내가 소원한 것을 쉬 들어 주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니 이런 괜한 찝찝한 생각이 든다. 영천돌할매 같은 분위기면 몰라도 절에서는 이런 돌로 사람 기분을 좌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안 들리는 사람보다 들리는 사람이 더 많으니 보는 사람 마음도 불편하다.

 

어쨌든 불교대학생도 아니면서 아내 덕에 참가해 숭고한 사찰순례를 잘 마쳤다. 불교대학 행사에 동참하면 오가는 길이 멀어도 덜 지겹고, 동참금 또한 저렴하기 그지없다. 거기다가 먹을 것은 얼마나 풍족하게 주는지 미안할 정도다. 오늘 사찰순례에 참가해 길고 긴 하루였지만, 많은 것을 보고 공부를 했다. 사람이 떠나는 길은 그 길이 곧 학습장이다. 길 위에서 온갖 학습을 다한다. 길 위에 삶이 있고, 길 위에 인생이 있다. 난,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친 세월보다 오십대에 이르러 길 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오늘 하루도 사찰을 탐방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공부를 했다. 운영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1. 적멸보궁 금강산 건봉사 이야기

 

 

위치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전화번호 : 033-682-8100

 

금강산 건봉사에 대해 알고 볼까요.

 

. 건봉사홈 <http://www.geonbongsa.org>

 

520(신라 법흥왕 7)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 대웅전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4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寺格)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금강산 건봉사와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636(선덕왕 5)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중 일부입니다.

자장법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월정사,법흥사,정암사,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 가버렸습니다. 그 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 등의 문제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오게 됩니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셨는데, 그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였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하였습니다.(석가여래치상탑비) 이것은 귀중한 진신사리가 다시 약탈될 경우를 우려해 나누어 분장한 것입니다.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부터입니다. 1986610, 민통선 이북지역에 있어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했습니다.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임을 사칭한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났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 그들은 이틀간 사적 조사단운운하면서 제초작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일당은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습니다.

 

하지만 6월 하순부터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일당은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714, 일당 중 주범 씨는 결국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호텔로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사진으로 얘기하는 금강산 건봉사

 

 

 

주차장 한 켠에 있는 '출정사'란 조정암의 시비. 싯구마다 전쟁의 상흔이 아로새겨진다. 여기가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접전 지역 중의 한 곳이다.

 

 

 

 

1920년대 건봉사 모습 

 

'금강갑계발상지' 표지석. 구한말 의병으로 활약하다 건봉사에 숨어들어 수행승이 된 이금암(1879~1943)은 건봉사에 전해 오는 염불만인회 5대 화주가 된 뒤 이웃사랑과 구국개화운동을 펼치기 위해 봉명학교와 청년회, 소년회를 만들고 마을마다 이웃끼리 친목을 다지는 금강갑계를 조직합니다. 금강갑계는 상부상조하며 불교 4대 명절을 비롯해 단오와 추석 체육대회, 설 이웃돕기, 경로잔치, 민속명절 행사, 장학사업을 벌이며 지금까지 이어온다.

 

이금암이 1934년에 쓴 금강갑계발기취지문. 내용이 구구절절 심금을 울린다.

 

 

건봉사의 불이문은 일반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특이하게 기둥이 4개로 되어 있다. 4개의 돌기둥에는 금강저가 음각되어 있고, 금강저가 천왕문을 대신한다. 금강저란 인도 고대 신화에 나오는 무기였다가 스님들이 지니고 다니는 불교 수행 도구, 법구가 되기도 했고, 절의 수호신인 금강역사가 들고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불이문 옆에는 고성군 관리수로 지정된 500년 묵은 노거수 팽나무가 있다. 전란에 사찰이 모두 전소되었지만, 유일하게 불이문만 화마를 피해 건재하고 있었다. 팽나무가 지켰다고 해서 그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노거수다.

 

아치형의 능파교를 지나면 대웅전으로 가기 전에 십바라밀석주가 나온다.

 

연화교를 지나 등공대로 올라도 된다.

 

 

다리는 능파교라 하고 다리를 건너면 십바라밀석주가 양 옆으로 서 있고, 1900년대 후반에 건축한 누각 봉서루가 보인다. 봉서루를 지나면 대웅전이다.

 

금강산건봉사란 편액이 걸린 누각이 봉서루이다. 

 

 

봉서루 앞 '십바라밀석주'. 석주의 십바라밀 도형(圖形)에는 대승불교의 기본수행법인 보시(보施), 지계(持戒), 지혜(智慧)의 바라밀에다 이 여섯가지를 보조하는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知)의 4바라밀을 첨가해 구성한 것으로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가지 수행의 방법을 상징하여 나타낸 것으로 그 하나하나에는 깊은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

 

물이 나무 고랑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재미있다.

 

 

봉서루에서 바라본 대웅전

 

 

옛날 대웅전 모습(홈에서 펌)

 

 

만일염불당. 이 법당 안에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5과를 모시고 있고 직접 친견할 수 있다.

 

 

사진 촬영금지라 건봉사 홈에서 가져옴.  부처님 진신치아사리(오늘 실제 모습을 봄)

 

 

 

명부전에는 전란 중 목숨을 잃은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시고 넋을 위로하고 있다.

 

 

 

명부전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아내

 

 

 

 

대웅전에 등공대로 가는 길이 있다.

 

 

 

 

경내를 탐방하고 봉서루로 다시 나와 적멸보궁으로 간다.

 

 

 

 

 

하늘은 푸르고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어 덥지만 그래도 마음은 티 없이 맑기만 하다.

 

30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며 건봉사의 연흔을 담고 있는 푸른 소나무.

 

 

 

 

건봉사 적멸보궁 앞에서

 

 

 

 

적멸보궁 사리탑

 

 

 

 

적멸보궁 앞 연못에 핀 노랑어리연

 

연꽃과 노랑어리연

 

 

적멸보궁을 탐방하고 다시 대웅전으로 가 해탈의 길이라는 등공대로 올라간다.

 

등공대까지 대략 2km남짓. 개인적으로는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코스다. 난 다른 곳은 보지 않더라도 여기는 올라갔어야 했다.

 

등공대로 올라가는 길섭에는 칡꽃 정도 보여주고만다.

 

여보시오. 해탈하러 가시나이까?

 

여기까지 왔다. 저기 들어오라고 문이 열려 있건만, 고만 생리현상이 발동하여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내려와야만 했다. 아쉽고 또 아쉬웠던 순간이다. 저 문을 들어가야 북녘의 금강산을 비롯하여 조망을 즐기고, 야생화도 좀 보았을텐데 다 와 놓고 가지 못해 못내 아쉽다.

 

이 지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철저한 신분 확인을 한 후 들어갈 수 있었다. 요즘은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등공대까지 가지도 못하고 다시 내려오는 길에 하늘이 너무 좋아 담아봤다.

 

개망초 속의 기생초

 

 

 

 

 

 

 

 

아내의 불교대학 법우들. 불심이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늘 자랑하는 분들이다.

 

 

 

 

 

 

 

주차장 가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 소나무들이 하나 같이 명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2. 진전사 이야기

 

 

 

진전사

<> 다음 백과사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24·5

시대 : 고대/삼국, 기념물 제52(1982113), 건립시기 9세기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효시가 되었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초조(初祖)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의는 784(선덕왕 5)에 당나라로 가서 지장(地藏)의 선법(禪法)을 이어받고 821(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하였으나, 사람들이 교종만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선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에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와 손상좌 체징(體澄)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중기의 일연(一然)이 이절의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삼층석탑 1기와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진전사지부도가 있으며, 절터는 양양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전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효시가 되었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초조(初祖)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의는 784(선덕왕 5)에 당나라로 가서 지장(地藏)의 선법(禪法)을 이어받고 821(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하였으나, 사람들이 교종만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선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에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와 손상좌 체징(體澄)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중기의 일연(一然)이 이절의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저기 보이는 숲으로 들어갔다. 겨우 동자꽃이랑 여뀌류만 보인다. 이번 행차는 야생화와 인연이 없다. 염불은 안 하고 젯밥에만 귀를 기울인지라 부처님이 꽤심하게 여겨 보여 주질 않은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삼층석탑 1기와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진전사지부도가 있으며, 절터는 양양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숲속으로 들어가 겨우 요놈만 봤다.

 

 

술패랭이도 봤다.

 

 

 

 

 

 

3. 동해사 이야기

 

한국근본불교 조계종 동해사

 

 

한국근본불교 조계종 동해사

 

동해사 : 강원 양양군 손양면 학포길 198, 양양군 손양면 학포리 156번지

전화번호 033-672-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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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 손양면 학포리 동해사의 매년 신도들이 기도를 하는 성지 주변의 반경 20m에 가랑비가 내려 사찰을 찾는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동해사에 따르면 이 비는 1992년부터 매년 101215일 사이 시작돼 112025일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비가 내리는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0년대 말에는 자작나무에서 사는 곤충의 배설물이라는 추측도 있었으나 비의 양이 워낙 많은데다 24시간 내내 내려 동해사에서는 이 비를 감로법비라고 부르고 있다.

 

감로법비는 창호지에 떨어진 후 20여 초면 얼룩도 남지 않고 흔적이 사라질 뿐 아니라 성지 위를 감싸고 있는 자작나무를 흔들어도 비의 양이 변하지 않아 탐방객들에게 신비감을 주고 있다.

 

동해사주지 무일 스님은 법비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불자로서 참진리를 실천하라는 의미와 함께 보다 많은 이에게 깨달음을 줘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부처님의 배려로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