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과 의기녀 논개 그리고 진주 남강이 빚어낸 유등축제
그 현장을 가다.
■ 언제 : 2015. 10. 3.(토)
■ 어디로 : 경남 하동 제5회 코스모스축제 현장 및 진주유등축제장
■ 누구랑 : 아내랑 딸내미랑
■ 어떻게 : 대구 지역 사설 산악회 동참
진주등의 유래
<펌. 진주남강유등축제 홈>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3,800여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병력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2만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진주대첩’을 거둘 때 성 밖의 의병 등 지원군과의 군사신호로 풍등(風燈)을 하늘에 올리며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 전술로 쓰였으며, 진주성내에 있는 병사들과 사민(士民)들이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이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김시민 장군의 군사신호로,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의 도하작전을 저지하는 전술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두루 쓰였던 진주남강 유등은 1593년 6월 10만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통한의 ‘계사순의(癸巳殉義)’가 있고 난 뒤부터는 오직 한 마음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와 겨레를 보전하고 태산보다 큰 목숨을 바쳐 의롭게 순절한 7만 병사와 사민의 매운 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세세연년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진주남강 유등축제로 자리 잡았다.
유등축제의 연혁
<펌. 진주남강유등축제 홈>
임진왜란 시 진주성전투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유등은 개천예술제에서 유등놀이의 형태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으며, 개천예술제 행사의 일환으로 추진되어온 유등놀이가 2000년 10월 대규모 진주남강유등축제로 발전되었다.
특히 2003년도에 진주남강유등축제가 문화관광축제 예비축제에 선정되면서 지역 축제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축제로 발전 전기를 맞았다.그 후 진주남강유등축제는 2004년 육성축제, 2005년 우수축제, 2006년부터 2010년 까지 최우수축제에 선정되었고 2011년, 2012년, 2013년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되었으며, 지금은 글로벌 축제로 캐나다, 미국LA로 수출하는 등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고 있다.
흔적
하동의 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축제를 뒤로하고 북천에서 차량으로 1시간 쯤 이동하여 진주로 갔다.
진주는 지금 유등축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넘치는 인파로 주체 측에서는 환호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부에서는 다른 시각 차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올해부터 축제를 유료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입장료는 무려 성인 1인 당 만원에 달한다.
작년까지 무료로 진행하던 행사를 갑자기 유료로 전향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판단이다.
유료화로 인해 당장 눈에 띄는 것이 진주교·천수교 난간에 가림막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처음엔 무엇때문에 가림막을 설치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저 막연하게 위험 요소를 예방하기 위해 가림막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순진한 이해였고,
가림막을 설치한 목적은 다리에서 남강에 떠있는 유등을 공짜로 보지 못하게 함이 그 이유였다.
어차피 유료로 한 다음에야 다리 위에서 보면 모두 보이니 흑자를 위한 자구지책이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을까는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물론, 진주 시민들에게는 무료 입장권을 발매하여 불만의 요소를 사전에 무마시키려 했다지만
교량을 지나는 사람이 어찌 진주 시민에 국한된다고 할 수 있겠나.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가림막을 난도질한 경우까지 발생했다.
예고된 난행이라 봐야 할 것이다.
다른 이유야 어찌되었건 진주유등축제의 규모는 엄청났다.
무려 7만 7천개의 유등을 비롯하여 10월 3일 우리가 갔던 당일에만 5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수치적으로는 20만명 이상이 입장하면 흑자를 본다고 하니 이미 축제는 흑자 분위기가 만연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진주 서문으로 갔다. 관광버스는 외곽에 임시로 설치한 곳에 주차를 하고
우리는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행사장까지 입장을 했다.
우리는 단체라 산악회에서 미리 입장권을 발매하여 개별로 나누어 주었기게 매표소 앞에 줄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매표소 앞은 매표를 위한 관람객들로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매표를 위한 긴 줄을 뒤로하고 우리는 휘바람을 불며 가볍게 서문을 통과하여 호국사로 갔다.
호국사 대웅전 아래 금빛 찬란한 꽃을 피운 나무가 진향 향내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만리향이라 부르는 금목서였다.
향기가 만리를 퍼진다는 데 바로 코앞에서 향기를 맡노라니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되었는지 한 동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었다.
호국사에서 나와 호국·충정의 길을 따라 서장대로 갔다.
서장대 성벽에 서니 유유히 흐르는 남강과 진주 시내 일원이 한 눈에 보인다.
어느새 해가 서산 너머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진주성은 지금 온통 유등으로 도배되어 있다.
각양각색의 형태를 다 가지고 있다. 모두 어떻게 만들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특히 등공예 작품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수준이 높다.
현장에서 직접보니 정말 더 실감이 난다.
촉석루에 다다라 논개의 영정과 사당을 모신 의기사에 들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진도 제대로 담지 못하고 공부가 될 만한 자료만 챙긴 후
가볍게 목례를 올리고 의암으로 바로 내려갔다.
아이들 수학여행 데리고 진주성엘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의암을 보는 것은 두 번째다.
그때도 그리 느꼈지만, 주안상을 물가의 바위에 차려 놓고 적장을 껴안고
초개 같이 목숨을 던졌을 것을 생각하니 그 바위가 그냥 평상 바위 같지만 않아 보인다.
어쩌면 남강에 떠 있는 오늘의 유등은 논개로 비롯되었음일 수도 있다.
유등을 이용한 진주성 축제는 축제가 아니라 의기녀 논개의 눈물일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김시민 장군의 분노와 장수, 승병들의 구국 혼이 남강을 환하게 비추는 핏물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눈엔 그리 보인다.
피 투성이 전장의 상흔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저버린 조상들의 핏빛 현장이 오늘은 축제로 난리법석이다.
상전벽해라 함은 진정 이를 두고 하는 말일지어다.
의암을 지나 남강에 임시로 가설한 부교를 건넜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면 위험할 수 있어 인원 통제를 하면서 건너게 했다.
건너는 데 다리가 울렁거리는 재미는 있지만, 손이 흔들려 카메라 셔터 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균형을 잘 잡아가며 셔터를 누를만큼 누르며 건넜다.
부교를 건너니 등으로 이어진 긴터널이 보였다.
소원등 터널로 그 길이는 600m에 달했다.
터널 속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고 있자니 날씨가 어둑해져 소원등 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또한 장관이었다. 촉석루 뒤로 보이는 성곽과 진주성이 불야성을 이루어
진주 남강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규모였다. 진주성 내외에 설치된 7만 7천개의 유등에 불이 켜진다고 생각해 보라.
실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임 시간은 한 시간 삼십분 남짓 남았지만, 너무 복잡해 안에 있기가 지루했다.
일찍 나가 다리 위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할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가가면 다시 표를 구입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나갔다. 그런데 다리 위를 거닐다보니 앞에서 피력한 것처럼 다리 위를 온통 가림막으로 막아 놓았다.
이런, 뭔 이런 경우가 있지. 라며 투덜거리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인근에 있는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나도 시간이 남았다. 할 수 없이 강가로 갔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표를 구입하고도 밖으로 일찌감치 나와 버리는 바람에
표를 구하지 못해 가림막 너머로 구경하는 무리와 뒤섞여 불꽃놀이를 구경할 판이다.
표를 끊지 않았던 사람이나 표를 끊었던 우리나 별반 다를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불꽃놀이는 하늘 높이 터지니 밖이나 안이나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멀찍히 떨어져 사진 촬영하기에는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어찌 되었던 볼 건 제대로 다 봤다. 실은 불꽃놀이는 안 봐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나왔는데
결국 다 본 셈이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을 타러 갔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우리 앞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거 낭패다. 얼른 봐서 차량 세 대는 와야 할 것 같은데 이러다 차량 시간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우려가 되기도 했다.
다행히 차 2대 만에 셔틀을 탈 수 있었다.
집합장소에 가보니 시간이 조금 남았다.
안도의 한 숨을 쉬며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자니 8시 30분에 출발예정이었던 차가
예기치 않게 늦은 사람 때문에 거의 30~40분이나 늦게 출발을 하였다.
일부 일행들로부터 원성을 듣긴 했지만, 나는 우리가 늦지 않아 곤혹스러움을 겪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예전에 우리도 그런 적이 한 번 있었다.
서로 갔겠지, 설마 가지 않았겠지 반신반의하며 아내를 기다리게 하다 본의 아니게 늦은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늦은 사람을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단지 우리가 늦지 않았음에 안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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