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에 설백이 된 지리산
■ 언제 : 2019. 3. 30.(토)
■ 어디로 : 지리산 노고단
■ 누구랑 : 아내랑
흔적
어제 모처로 깽깽이풀을 보러갔다.
지난주에 이어 2주 연속이다.
2주 전엔 자그마한 망울만 폈더니 그 사이 많이도 피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비록 꽃잎이 보기 좋게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쁘기만 했다.
하루 정도 늦추어 갔더라면 더 좋은 모습을 볼 수 있었겠더라만,
요즘 이 산 저 산 앞 다투어 꽃이 피는지라 깽깽이풀에만 전념할 수가 없다.
올해 깽깽이풀은 이 정도로 만족할란다.
그래도 작년에 비하면 대만족이다.
아침 일찍 지리산을 향해 달렸다.
근래 산행을 게을리 한 죄로 지리산부터 먼저 찾고 싶었다.
이제부터라도 지리산을 필두로 산에서 놀아볼까 싶다.
기름 값 걱정 없는 ‘코나’도 사고했으니 이 산 저 산 한번 다녀보자.
요즘 야생화는 서로 경쟁하듯 피고 진다.
이 산엔 얼레지 저 산엔 처녀치마
난, 올해 들어 아직 얼레지도 못 봤고 처녀치마도 못 봤다.
얼레지와 처녀치마를 보려면 애들이 피어 있는 산을 찾아가야한다.
지리산 얼레지는 5월이 되어야 볼 수 있다.
그래도 난, 오늘은 지리산이 먼저다.
봄꽃이 더딘 산이지만 오늘은 봄꽃보다 지리산이 먼저다.
지리산! 노고단이라도 가야겠다.
거창휴게소를 지나니 멀리 무주 덕유산에 하얀 백발이 서려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모양이다.
순간 덕유산으로 방향을 틀까하는 갈등이 일었지만,
이내 덕유산이 저런 모습이면 지리산은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섰다.
관성이 이끄는 대로 달렸다.
예상대로 지리산이 가까워질수록 덕유산보다 더 많은 눈이 보인다.
오늘 잘하면 봄꽃대신 눈꽃을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성삼재휴게소에도 전기자동차 충전기가 있다.
완충해서 갔기에 잔량은 충분하였지만, 그래도 만사불여튼튼이라 했으니 충전부터 시켰다.
탐방안내소 전광판을 보니 현재 기온이 영하 2℃를 가르친다.
아직 10시가 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나뭇가지 위에 얹힌 눈은 녹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뭇가지에 상고대가 서린 것이다.
연한 상고대(Soft Rime)와 굳은 상고대(Hard Rime)까지 다 있다.
초입부터 눈을 밟고 간다.
길바닥엔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눈이 쌓였다.
올라갈수록 햇빛에 반사된 상고대가 수정같이 반짝이더니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따뜻한 봄날에 때 아닌 설국의 세계로 빠져 든다.
평소 사진을 잘 찍으려 하지 않던 아내도 마냥 신기하기만 한지,
폼(form)을 잡고 찍어 달래기 바쁘다.
춘삼월에 보는 특별한 설경인지라 찍는 족족 작품이다.
특별한 배경이 필요 없다.
앉은 자리, 선 자리 가릴 것 없이 멈춘 자리가 포토존(photo zone)이다.
하얀 눈밭을 걷는 아내의 뒷모습은 설경 사진의 화룡점정으로 빛을 발한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니 이건 뭐 설국이 따로 없다.
말 그대로 환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에 다가오는 감흥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노고단을 찾은 등반객 너 나 할 것 없이 탄성을 자아내기 바쁘다.
나이 불문하고 동심으로 돌아간다.
한 무리의 등반객은 나이도 적당히 있더만,
남녀 가릴 것 없이 서로 모델이 되어 사진 찍기 바쁘다.
눈꽃으로 뒤덮인 환상의 세계가 나이마저 잊게 만든다.
노고단 정상으로 가는 길에선 사실 눈꽃보다 야생화에 대한 기대를 살짝 가지고 있었다.
지금 시기에 있을 리 만무하고 혹시 있더라도 눈에 덮여 보이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기대감은 저버리지 않았다.
만약 하나라도 본다면 그건 횡재수나 다름없다.
지리산 얼레지에 춘설이 살짝 내려앉은 모습을 상상해 보라.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다못해 요즘 어디서나 흔하게 핀 제비꽃이나 현호색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생각대로 지리산의 봄은 더디긴 더디다.
풀꽃 하나 안 보인다.
풀꽃은커녕 해묵은 수리취만 눈을 맞은 채 꼿꼿하게 섰다.
수리취는 겨울 산행하면서 심심찮게 보는 녀석이다.
이 녀석은 해가 바뀌어도 색만 바래졌지 그 형태는 늠름하게 간직하고 있다.
마치 지 녀석이 산나물의 제왕인 듯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모른 척 하늘 바람을 맞고 당당히 섰다.
노고단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은혜의 길이다.
노고단을 오르며 뒤돌아보는 풍경이 얼마나 정겨운지 모른다.
아내와 난 오늘 그 모습이 그리워서 왔다.
노고단 정상으로 갈 땐 앞만 보고 가지 말고 한 번쯤 뒤돌아보자.
만복대를 지나 정령치로 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반야봉으로 가는 종주 코스도 눈 아래 보인다.
이 길에 야생화가 즐비할 때쯤이면 더 말할 나위없다.
어찌 은혜 받은 길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노고단 정상 가까이 다가서면 구상나무 한 그루를 먼저 만난다.
의젓하고 당당한 모습이 마치 노고단을 지키는 파수병 같아 보인다.
오늘은 이 구상나무가 하얀 눈을 이고 있어 평소와는 달리 보인다.
하얀 눈을 인 구상나무 한 그루가
느닷없이 꽃피는 춘삼월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노고단 돌탑에 올라서니 칼바람이 분다.
올라올 때는 바람이 불긴해도 견딜만했는데 정상은 상황이 달라도 많이 다르다.
섬진강 전망대에 서니 바람이 어찌나 센지 곧 섬진강으로 빨려들어 갈 것 같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 등을 돌려야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을 정도다.
그래도 찍을 건 다 찍는다.
돌탑에 얼기설기 눈 쌓인 모습이 이채롭고 경계목에 가지런히 얹힌 눈도 예뻐다.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다.
억센 강풍에 밀리면서도 억척스럽게 찍어댄다.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 바쁜데 도리어 거센 바람에 예쁜 눈꽃 다 날아갈까 염려도 된다.
다행한 건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눈꽃이 그 드센 바람에 잘도 버틴다.
톡 건드리면 툭 떨어지는 눈꽃이 의외로 바람에는 강하다.
눈결 따라 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이라 견딜 수 있나보다.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노고단 전망대에서 좀 더 놀다 가고 싶은데
강한 바람에 도저히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다.
겨우 정상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선 내려가기 급급하다.
힘들게 오고선 싱겁게 내려간다.
그래도 내려가면서 보는 풍경은 여유롭기만 하다.
올라가면서 뒤돌아보곤 했던 풍경이지만,
내려가면서 여유롭게 보는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만복대와 반야봉으로 가는 길에도 상고대가 하얗게 서려있다.
모두 아내와 함께 걸었던 길이다.
만복대의 얼레지 군락과 반야봉의 곰취가 눈에 아른거린다.
성삼재에서 반야봉을 거쳐 뱀사골로 내려갈 때 발목을 접질려 고생하던 아내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애처롭기 그지없다.
접질려진 다리로 화개재에서 뱀사골 가는 먼 길 내려가느라 생똥을 샀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그 길은 다시 쳐다보기도 싫단다.
지리산에 오면 이 생각 저 생각 다 든다.
봄이 완연한 계절에 지리산에 와
봄꽃 대신 하얀 상고대를 봤다.
상고대와 함께 파란 하늘과 맑은 날씨는 덤으로 주어졌다.
바람이 강하긴 했지만 그깟 바람쯤이야 상고대 삼박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 지리산에 온 것은 참말로 행운이다.
시부저기 지리산 왔다가 복 많이 받고 간다.
지리산의 노고단 코스는 비교적 여유 있는 길이다.
느릿느릿 실컷 즐기고 왔어도 시간이 남는다.
잘됐다. 오늘은 시간도 남고 하니 지리산 실상사나 가야겠다.
그동안 지리산 다니며 늘 시간에 쫓겨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던 곳이다.
실상사, 오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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