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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잡이

[여행] 강원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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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한국교직원신문 2014-12-15  박강섭 국민일보 여행전문기자      

잎과 꽃, 모든 색마저 버린 채
설국에 가득한 흰빛의 수직선

자작나무는 우아하다. 엄동설한의 추위를 헐벗은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곧게 뻗어 올라간 자작나무들의 하얀 직선은 한겨울의 눈과 만나 보석처럼 빛난다. 화려했던 가을의 기억을 언 땅에 묻고 침묵하는 자작나무, 살아온 세월만큼 고독의 그림자가 길고 짙은 자작나무, 상처 난 삶을 치유하고 위로받고 싶다면 달빛과 별빛, 그리고 햇빛의 영혼이 깃든 겨울 산 자작나무 앞에 서야 하는 까닭이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품고 있는 강원도 인제는 겨울이 오면 동화 속 설국으로 변신한다. 색색의 래프팅 보트가 급류를 타던 내린천은 무명천을 펼쳐놓은 듯 하얗게 얼어붙는다.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한 소나무는 무시로 은가루를 뿌리고, 솜이불을 뒤집어쓴 산골 오두막들은 굴뚝에서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며 정담을 나눈다.

인제군 원대리의 원대봉(684m) 산비탈에 군락을 이룬 자작나무숲은 여의도공원 두 배 넓이인 138㏊(41만여 평). 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가 1990년대 초기에 병해충 피해목을 베어내고 자작나무 묘목 70만 그루를 심었다. 자작나무가 속성수인데다 쓰임새가 많고 비교적 병해충에 강하기 때문이다. 산불 조심 기간을 제외하고 일반에 공개되는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25㏊.

산불감시초소에서 자작나무숲까지는 3.2㎞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이다. 산림청은 군사작전도로로 개설된 임도를 보수하고 자작나무숲에 탐방로 3.5㎞(1코스 0.9㎞, 2코스 1.5㎞, 3코스 1.1㎞)를 개설했다. 눈이 발목 깊이로 쌓인 임도에는 심심산골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루와 고라니 등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완만한 등고선을 그리는 임도가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눈을 흠뻑 뒤집어쓴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사랑받는 소재

북위 45도 이상의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 자작나무는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한반도의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 러시아와 핀란드 등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하얀 피부로 인해 ‘숲 속의 귀족’으로 불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작나무가 문학작품의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까닭이다. 톨스토이가 묻힌 곳도 자작나무숲이고 영화 ‘닥터 지바고’와 ‘러브 오브 시베리아’ 등 명화에 등장하는 숲도 당연히 자작나무숲이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가는 겨울 자작나무’
 (정끝별 시인의 ‘자작나무 내 인생’ 중에서)

한국 문인들의 자작나무 사랑도 자작나무가 국수(國樹)로 추앙하는 러시아 못지않게 유별나다. 고은 시인은 삭풍이 부는 칠현산 기슭의 겨울 자작나무숲에서 ‘강렬한 경건성’을 발견했다. 안도현 시인은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하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라고 극찬했다. 강윤후 시인은 자작나무숲을 ‘흑판에 백묵으로 마구 그은 선’처럼 보인다고 표현했고, 도종환 시인은 ‘곧고 맑은 나무’에서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1970년대까지 화전민들이 살던 마을의 산비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삼팔선에 위치한 원대리는 한국전쟁 때 적군과 아군이 번갈아가며 점령하던 격전지. 견디다 못한 주민 20여 가구는 군인들이 없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궜다. 한때는 회동초등학교 분교가 들어설 정도로 주민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작나무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삭풍에 맞서 침묵을 지키는 그들의 한겨울

자작나무숲은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는 새봄과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환상적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벌거벗은 자작나무가 삭풍에 맞서 묵묵하게 침묵을 지키는 한겨울을 으뜸으로 꼽는다. 한겨울의 자작나무숲은 시야를 흐리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오로지 순백의 수직선들이 만들어내는 한 폭의 수묵화만 존재할 뿐이다.

여느 자작나무숲과 달리 원대리는 숲 속에서 자작나무를 만나는 흔치 않은 공간. 자작나무숲 입구에는 문화재 복원용으로 지정된 금강송 몇 그루가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독야청청 산수화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북서풍을 피해 햇살이 잘 드는 비탈에 뿌리를 내린 자작나무숲에는 간벌한 자작나무로 만든 숲 속의 교실과 원뿔형의 인디언 오두막처럼 만든 두 개의 쉼터가 겨울 숲을 지키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생태연못은 자작나무와 낙엽송 군락이 만나는 경계지역. 하얀 자작나무와 검은 낙엽송이 연출하는 흑백의 수직선들이 눈 덮인 비탈을 오르내린다.

자작나무는 여느 나무에 비해 쓸모가 많다. 한약재로도 사용되는 자작나무 껍질은 매끄럽고 질긴 데다 수십 년이 흘러도 잘 썩지 않아 종이 대용으로 사랑받았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天馬圖)가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까닭이다. 백두산 자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죽으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여 묻혔고, 심마니들은 산삼을 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보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죽어서 더 강한 자작나무는 수레바퀴로 사용될 정도로 단단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일부가 자작나무로 제작된 것도 이 때문이다. 곡우 때 나는 자작나무 수액은 무병장수에 좋고, 충치 예방에 좋다는 자일리톨도 자작나무에서 추출된다. 활엽수 중 피톤치드가 가장 많은 자작나무가 아토피 피부염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힐링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과거로 떠나는 시간의 문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이루어지지 못한 어린 시절의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이승기의 뮤직비디오 ‘되돌리다’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영상미가 뛰어난 뮤직비디오에서 이승기는 원뿔형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과거로 떠나 어린 시절 좋아했던 여학생과 함께 자작나무숲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20~30m 높이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햇빛을 흡수하기 위해 높은 가지인 우듬지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모든 가지를 도태시키는 아픔을 감수한다. 가지가 떨어지면서 생긴 검은 생채기가 하얀 껍질과 어우러져 기하학적 무늬를 연출하는 자작나무의 나이테들. 아픈 만큼 성숙한 자작나무의 그 나이테 속에는 세상의 모든 빛이 차곡차곡 저장돼 있다. 

사진설명= (위)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의 산비탈에 뿌리를 내린 20~30m 높이의 자작나무가 설산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전봇대처럼 쭉쭉 뻗어 있다.
(아래)원대리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임도변의 나목에 상고대가 활짝 피어 있는 가운데 눈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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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둘러싸인 설피마을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설피마을은 한 해의 반이 겨울인 동화 마을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은 남설악의 점봉산(1424m)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설피마을의 행정 명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2리. 새도 자고 넘는다는 조침령 등 백두대간 고갯마루와 점봉산 원시림에 둘러싸인 설피마을은 물푸레나무와 소가죽으로 만든 덧신인 설피(雪皮)를 신고 다닐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해발 700∼800m 고지에 자리 잡은 설피마을은 외딴집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람이 거세 ‘바람불이’로 불리는 마을 입구에서 곰배령 아래에 위치한 강선리까지 12㎞에 걸쳐 골짜기마다 집이 한두 채씩 들어앉아 이웃으로 마실이라도 가려면 20분 이상 걸어야 한다. 지붕이 덮일 정도로 폭설이 내리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설피를 신고 눈을 다져 집과 집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진풍경도 이곳에서는 예삿일.

기린 초등학교 진동분교와 마을회관을 지나 북쪽으로 5분쯤 달리면 차가 다닐 수 없는 삼거리가 나온다. 곰배령·박달령·북암령·점봉산 산행의 들머리인 삼거리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보부상 길의 중간지점으로 옛날에는 주막이 있던 곳이다. 현리와 설피마을을 연결하는 아스팔트 도로가 생기기 전인 92년까지만 해도 설피마을 사람들은 바깥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단목령을 넘어 오색까지 험난한 산길을 걸어 다녔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곰배령으로 가려면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택해야 한다. 10여 가구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강선리에서 곰배령까지는 10리 길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야생화 꽃길로도 유명한 곰배령 가는 길은 평탄한 데다 4월 초가 돼야 눈이 녹는 우리나라 최고의 눈꽃 트레킹 코스. 아름드리 전나무와 신갈나무, 주목이 군락을 이룬 점봉산과 곰배령 일대는 산림유전자원으로 보호되는 원시림이다.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있는 형상인 곰배령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과 다름없다. 복수초와 얼레지 등 야생화들이 눈 속에서 봄 꿈을 꾸고 있는 해발 1100m의 광활한 평원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쏟아지는 별빛과 정담 나누다 홀로 잠드는 마을, 아침에 눈 뜨면 방문이 열리지 않을 만큼 눈이 쌓이는 마을, 눈 터널을 뚫거나 설피 신고 눈을 밟아 길을 만드는 마을, 설악산 대청봉이 뒷동산처럼 아늑한 설피마을이 설국(雪國)의 아련한 기억들을 모아 겨울동화를 엮는다.
 



여 행 수 첩

◆ 가는길

경춘고속도로 동홍천나들목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인제 읍내까지 간다. 인제 읍내에서 소양강을 가로지르는 합강교를 건너 내린천을 거슬러 오르다 원대삼거리에서 좌회전해 4.5㎞ 정도 달리면 원대리 자작나무숲으로 들어가는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자동차는 이곳에 주차하고 임도를 따라 걸어야 한다. 서울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인제 읍내에 도착하기 전 남전계곡을 따라가는 길이 지름길이지만 겨울철에는 제설이 되지 않는 고갯길이므로 위험하다.

◆ 볼거리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산불 조심 기간(봄철 2월 1일~5월 15일, 가을철 11월 1일~12월 15일)에는 입산이 금지된다. 건조주의보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번 주부터 입산할 수 있다. 자작나무숲에서는 캠핑과 취사는 물론 수렵도 금지된다. 겨울철에는 임도가 미끄럽고 눈이 쌓이므로 반드시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스틱도 휴대하는 것이 좋다.(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36)

인제군은 매년 1월 말부터 2월 초에 신남 부평선착장에서 빙어축제를 개최한다. 무료로 진행되는 빙어낚시를 비롯해 맨손 빙어 잡기, 빙어 시식회, 빙어 빨리 먹기 대회, 빙어 젓가락 옮기기 등이 축제 하이라이트. 눈썰매장과 눈 미끄럼틀이 설치된 빙어 낚시터에서는 빙상 인간볼링, 빙상 인간컬링, 빙상 경보대회, 빙판 통나무끌기대회, 얼음축구, 빙판 줄다리기 등 흥미진진한 게임이 진행된다.

인제 읍내의 산촌민속박물관 옆에 위치한 박인환문학관(033-462-2086)은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인제 출신 박인환 시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곳. 생가터에 건축된 문학관에는 시인의 활동무대였던 1950년대의 서울 명동거리가 조성돼 있다. 산촌민속박물관에는 산촌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엿볼 수 있는 수렵도구와 농기구 및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먹거리

인제의 으뜸 먹거리는 황태 요리이다. 미시령 터널에 진입하기 직전에 위치한 용대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황태 생산지로 백담마을과 황태 마을에는 황태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황태 요리는 뽀얗게 우러난 국물맛이 시원한 황탯국, 양념장을 발라 통째로 불에 살짝 구워 찢어먹는 황태구이, 황태·무·버섯·대파 등을 넣고 즉석에서 끓이는 황태 전골 등이 있다.(인제군 문화관광과 033-460-2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