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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한 명문가 자택 강릉 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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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한 명문가 자택 강릉 선교장

한국교직원신문 2015-01-12

박강섭 국민일보 여행전문 기자

 

[여행]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한 명문가 자택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의 123칸 규모 고택과 수백 년 수령의 금강송들이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채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설경을 연출하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밤새 소복소복 내린 눈으로 강릉 선교장이 한 폭의 수묵화로 거듭났다. 열화당을 비롯한 123칸 고택의 지붕은 눈 속에 파묻혀 용마루의 골격만 희미하다. 선교장을 둘러싼 유려한 곡선의 담장과 줄행랑의 굴뚝도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흑백의 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수백 그루의 노송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늘어뜨리고, 300년 선교장 역사를 지켜본 배롱나무는 목화처럼 탐스러운 눈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강릉 선교장은 설경이 황홀한 고택이다. 한번 내렸다 하면 눈이 무릎 깊이로 쌓이는 영동지방의 기상 때문만은 아니다. 123칸이나 되는 고택의 웅자(雄姿)와 선교장을 둘러싼 노송들의 고고한 자태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선교장의 설경이 매혹적인 까닭은 고드름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활래정의 눈 녹은 낙숫물이 얼어붙은 연못에서 청아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때문이다.

나눔으로 농민들 존경 받아

오죽헌과 경포대 중간쯤에 위치한 선교장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8~1781)이 300년 전에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100년에 걸쳐 증축했다. 조선 시대에 궁궐이 아닌 민가로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의 규모는 99칸. 그러나 예외 없는 예외는 없는 법이어서 선교장은 102칸이었다.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행랑채, 사당, 활래정에 하인의 집까지 더하면 300칸에 이를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지만 지금은 123칸만 전해온다.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집 앞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 집으로도 불리는 선교장(船橋莊)에 들어서면 맨 먼저 연못 위의 정자 활래정이 반긴다. 활래정은 선교장의 주인이 기거하던 공간으로 얼어붙은 연못에서 목이 꺾인 채 마른 줄기로 서 있는 홍련이 시심을 돋운다. 활래정(活來亭)은 주자의 시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집자한 것으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강릉 안인진리의 해변에서 염전을 일구고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한 이내번은 영동 일대를 개간해 대농장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제공했다. 남쪽으로는 삼척과 동해, 북쪽으로는 속초와 양양, 서쪽으로는 횡성과 평창까지 선교장의 농토였다고 한다.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영동 일대에 다섯 군데나 있었다고 하니 조선 최고의 만석지기 부자였던 셈이다. 여느 고택과 달리 집 이름에 ‘당(堂)’이나 ‘각(閣)’ 대신 ‘장(莊)’을 붙인 것도 독립영지를 가진 유럽의 귀족처럼 자급자족 경제시스템을 갖춘 장원(莊園)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교장의 주인들은 단순히 부를 축적만 한 것이 아니라 경주 최부잣집처럼 나눔과 상생의 삶을 추구해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갑오농민전쟁 때 선교장을 공격한 농민군을 물리친 세력이 선교장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한 소농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교장을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에 비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국 풍류객들의 보금자리

집에도 인격이 있다는 말은 선교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선교장의 대문은 의외로 너비가 2m 남짓으로 작은 편에 속한다. 해가 지고 달이 뜬 밤에 하루 묵고 갈 거처를 찾는 나그네가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고 발길을 돌릴까 봐 일부러 대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집 주인의 성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선교장의 넉넉한 인심은 자연스럽게 전국의 시인 묵객들을 불러 모아 풍류 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인근에 경포대와 경포호가 있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해 시인 묵객들은 선교장에 머물며 주인으로부터 온갖 편의를 받았다.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의 글이 선교장에 보존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선교장을 찾았고, 여운형은 선교장에 위치한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의 다회가 열린 곳도 선교장이다. 뿐만이 아니다. 집 곳곳에서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선교장은 영화나 드라마의 무대로도 인기가 높아 영화 ‘식객’을 비롯해 드라마 ‘황진이’, ‘궁’, ‘공주의 남자’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선교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처럼 길게 늘어선 23칸 크기의 행랑채. 하인을 비롯해 지나던 선비와 풍류객들이 머무는 공간인 행랑채는 주인이 부르면 하인이 뛰어가야 할 정도로 길다. 그래서 도망을 뜻하는 줄행랑이 행랑채에서 비롯됐다는 말도 전해온다. 일직선으로 늘어선 3개의 협문은 동쪽 끝에서 보면 원근감이 극도로 부각돼 사진작가들의 작품 소재로 인기가 높다.

날렵한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일품인 열화당(悅話堂)은 선교장 주인이 거처하던 사랑채로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어찌 다시 벼슬을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이름을 따왔다. 후손이 운영하는 출판사 열화당의 이름도 이곳에서 유래됐다. 현재 작은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열화당 앞의 테라스는 구한말에 러시아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준 것.

선교장은 건축물 자체로서도 운치가 있지만, 선교장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나지막한 산의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야 제멋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500~600년생 노송 16그루를 비롯한 수백 그루의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지정을 기다리고 있는 금강송들. 거북의 등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줄기가 용틀임을 하고 우산 모양의 가지에 눈이 쌓인 금강송은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나 나옴 직한 품격 있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그 금강송 아래로 유려한 곡선의 담이 선교장의 설경을 더욱 품격 있게 만든다.

사진설명=현존하는 고택 중 규모가 가장 큰 선교장의 행랑채.



 흐린 기억 속 '대관령 옛길'

‘늙으신 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사친시(思親詩)로 유명한 대관령은 해발 832m 높이의 백두대간 고갯길이다. 서울과 강릉을 잇는 옛 영동고속도로의 마지막 고개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줄기는 이곳부터 조금씩 낮아져서 대관령이 되어 동쪽으로는 강릉과 통한다’고 기록했다.

대관령은 백두대간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고갯길이다. 지금은 7개의 터널과 최고 90m 높이의 교량 33개로 이루어진 새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손쉽게 서울과 강릉을 오갈 수 있다. 하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아흔아홉 굽이로 이루어진 13㎞ 길이의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을 돌고 돌면 현기증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관령 표석에서 몇 굽이를 돌면 신사임당 사친시비가 나오고 다시 몇 굽이를 내려가면 반정 전망대가 나온다. 반정(半程)은 대관령 옛길의 중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대관령 옛길은 모두 7.87㎞로 반정에서 강릉 쪽으로 대관령박물관까지 6.04㎞ 구간과 반정에서 선자령 아래에 위치한 국사성황당까지 1.83㎞ 구간이 남아있다.

강릉 사람들은 대관령을 ‘대굴령’이라 부른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데굴데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그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 ‘대관령’(大關嶺)이 되었다. 대관령 오솔길은 1917년 8월에 옛길로 전락한다. 조선총독부가 오솔길 일부 구간을 넓혀 신작로를 만들면서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설국으로 변한 반정에서 가파른 옛길을 타고 3㎞쯤 걸었을까. 눈을 흠뻑 뒤집어쓴 초가집이 나온다. 강릉시가 복원한 주막으로 1.5㎞를 더 내려가면 하제민원터가 반긴다. 하제민원터는 산적 때문에 통행객 10명이 넘어야 통과시켜 주던 일종의 검문소로 강릉의 해산물과 평창의 농산물을 교역하던 선질꾼은 이곳에서 무리를 이뤄 고개를 넘었다.

하제민원터 아래에 위치한 원울이재는 울고 넘던 고갯길이다. 영동으로 발령받은 관원들이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자 세상 끝에 당도했다는 설움에 눈물을 흘리고, 떠날 때는 정 때문에 울며 넘었다는 고개다. 원울이재를 넘으면 이 골, 저 골을 수놓은 눈꽃이 거센 바람에 날려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대관령 옛길이 끝날 때쯤 시야가 확 트이면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금강송 군락지답게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붉은색의 금강송 군락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이어 설국으로 변한 대관령에 건듯 찬바람이 분다. 순간 금강송 늙은 가지에서 신사임당의 눈물처럼 눈꽃이 후드득 낙화한다.

사진설명=백두대간 고개인 대관령을 넘는 대관령 옛길과 영동고속도로가 폭설로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강릉JC에서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강릉IC에서 내려 경강로를 타고 경포 방향으로 달리면 오죽헌을 거쳐 선교장이 나온다. 강릉IC에서 선교장까지 승용차로 약 20분. 선교장에서는 한옥숙박체험을 비롯해 다도체험, 탁본 등 다양한 체험거리가 준비되어 있다.(033-646-3270)

◆ 볼거리
 오만 원권과 오천 원권 지폐의 주인공인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모자가 살았던 오죽헌은 강릉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오죽헌 맨 오른쪽 온돌방은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로 사랑채 툇마루 기둥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남겼다. 율곡의 유품 소장관인 어제각에는 율곡이 쓴 격몽요결과 열 살까지 썼던 벼루가 보관돼 있다.

호수의 물빛이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명명된 경포(鏡浦)는 석호인 경포호를 비롯해 호숫가에 세워진 경포대·해운정·금란정 등을 비롯한 누각과 정자, 그리고 호수 동쪽의 경포 해변과 바닷가 해송 숲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경포호는 둘레가 12㎞에 이르는 큰 호수였으나 농경지로 매립되고 토사가 흘러들어 4㎞로 줄었지만 호수 저편이 가물가물 보일 정도로 여전히 넓다.

강릉의 바닷가에는 주인이 직접 원두를 갈아 뽑아내는 250여 개의 전문 커피숍이 즐비하다. 강릉이 커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때는 십수 년 전. 우리나라 커피 1세대이자 일본식 핸드 드립의 최고수 커피 장인으로 불리는 보헤미안의 박이추씨 등이 강릉 커피숍의 원조로 왕산리에는 커피 박물관도 있다.

이 밖에도 강릉에는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축음기 등 소리 기기 4500여 점이 전시된 참소리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사진), 북한잠수함 등이 전시된 정동진의 강릉통일공원, 야외조각공원 등으로 꾸며진 하슬라아트월드, 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지인 정동진역 등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 먹거리
강릉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은 초당순두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이 400년 전 삼척부사로 부임해 바닷물을 간수로 써서 두부를 만들게 했다고 전한다. 경포호수 옆에 위치한 초당순두부마을에서는 현재 15곳에 이르는 순두부집이 성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