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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방

성역화 된 동방 제일의 수행도량 문경 봉암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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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단전에 위치한 희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특별수도원 봉암사 기행

 

 

■ 언제 : 2013. 5. 17. (금) 4시에 기상, 5시 출, 7시 착

■ 어디로 : 문경 봉암사

주소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전화 054- 571-9088

■ 왜 : 봉암사와 백두대간의 배꼽 희양산을 가고파서

■ 누구랑 : 아내랑

 

봉암사 개요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 년 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 불기 2526년(1982)부터 종립선원으로 희양산 남쪽 너른 터에 자리하고 있다. 봉암사를 둘러싸고 있는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 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 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가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 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봉암사 홈페이지에서 정리>


 

봉암사 보물과 문화재


봉암사 3층석탑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

이 탑은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로 9세기 경에 팔각원 단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여러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신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

이 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로 신라 경애왕 원년(서기 924년)에 세운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귀두는 한 개의 뿔을 장식한 용머리 형으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하고 다양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석비이다.

비문은 신라시대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분황사의 83세 혜강 노스님이 글을 쓰고 새겼다. 비의 높이는 2.73m이고 너비는 1.64m이다.


마애보살 좌상 (지방문화재)

이 불상은 환적의 찬 선사의 원불인데, 평소에 발원 기도하는 부처님 또는 보살이라고 전해오며 조각 연대는 고려말기로 추정된다.

높이는 4.5m, 폭이 4.4m인데 불두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 닷집 혹은 집 모양의 장엄물 처럼 만들었으며 광배, 후광을 겸하는 듯하게 처리 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꽃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말기의 양식과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


정진대사 원오탑

이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신라시대 이래의 기본형인 팔각 원당형을 따른 묘탑이다.

전체의 구조는 지증대사 적조탑을 그대로 따랐으며, 높이는 5m지대석 너비는 2.9m이다.


정진대사 원오탑 비

이 석비는 봉암사를 증흥한 정진대사의 부도탑 비로서 고려 후기의 조형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귀부와 이수의 형식은 일반적인 방식을 취하였으나 비좌가 두드러지게 큰 것이 특징이다.

 

 

흔적


  사월 초파일(四月初八日) 단 하루만 개방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문턱 높은 문경에 있는 봉암사와 봉암사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백두대간의 단전에 있는 희양산을 산행하기 위해 어둠이 짙은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아는 지인이 작년에 아침 7시에 도착하였음에도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니 일찍 서둘러야 했다. 4시에 일어났음에도 워낙 꾸물거리는 성격이라 1시간이나 지체하고 5시에 출발했다. 가는 내내 어쩌면 출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특유의 넉넉함과 안되면 예정된 희양산을 더 크게 돌고 오리란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가는 길도 굳이 고속도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 새벽 국도를 이용하니 고속도로보다 더 나은 국도는 한산하기 짝이 없고 거침없이 길을 내어 준다. 그렇게 막힘 없이 시원스럽게 달리다 보니 예상보다 빠르게 7시쯤 봉암사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년에 7시에 도착하여 출입하지 못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도 아침에 쓸데없이 꾸물거려 7시쯤 도착을 하게 된 것이다. 희양초등학교에 주차를 하려고 했으나 짐작한대로 이미 초등학교 운동장은 만차가 되었고, 우리는 주차를 관리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도로변에 늘어선 주차 차량의 300m 쯤 후방에 주차를 하였다. 우리가 주차를 하고난 이후에도 봉암사로 들어오는 차량 행렬은 끝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경찰과 봉사단의 안내를 받아 셔틀을 이용하려는 탐방객의 행렬 뒤에 설 수 있었으니 비로소 오늘 ‘입장이 가능하겠구나’란 안도감이 든다.


봉암사는 1년에 단 하루 초파일 날 아침 7시에서 저녁 7시까지 개방을 한다니 얼마나 많은 불자와 탐방객들이 오늘을 기대했겠나. 직접 현장에 와서 느꼈지만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시간적으로 늦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꽤 여유있게 입장을 한 셈이다. 물론 지금 시간에도 탐방객 수는 굉장히 많은 편이나 그래도 아직은 이른지 인산인해를 이루며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지는 않는다. 붐비기 전에 봉암사를 탐방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시간에 들어왔다.


봉암사는 특별수도원으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도록 스님들께서 등산로 곳곳에서 보초를 서면서 희양산에서 봉암사로 내려오는 길목을 통제하고 있다. 매년 단 한 번 사월초파일 하루만 개방하고 평소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턱 높은 사찰이며, 동방에서 제일가는 수행 도량이다. 그러니까 봉암사는 일반인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절이 아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봉암사 탐방을 하고 백두대간의 단전에 있는 희양산 산행을 해야 하니 실상은 마음이 바쁘다. 그런데 마음은 바빠도 난 항상 행동이 느리다. 느긋함이 몸에 밴지라 바쁜 마음 아랑 곳 없이 경내를 슬렁거리며 여기저기 눈여겨 살펴본다. 오늘이 가면 또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할 수 없어 가급적이면 빠뜨림 없이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다녀오고 나서 후기를 작성하기 위하여 선답자의 기행을 살펴보니 실상은 마음만 알뜰살뜰했지 많은 부분을 빠뜨리고 놓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다녀오고 나면 항상 그런 마음이 든다. 시간만 잔뜩 지체하고 살갑게 챙겨 보지 못한 것 같아 다소 아쉬운 맘이 드는 것은 실속 없이 느긋함만 몸에 밴 허점인가 보다.


봉암사에서 대략 3시간쯤 지체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주차한 곳으로 오다 보니 늦게 온 탐방객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정 없이 줄지어 서 있다.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당체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희양산을 가기 위해 승용차를 되돌려야 하는데 왕복 2차선 도로에 1차선은 탐방 차량으로 뒤덮여 있어 교통 통제를 하는 경찰의 수신호에 따라 농로로 우회하여 되돌아 나가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게 뭔 일인지 도로에 주차된 차량 행렬을 보니 참말로 가관이다. 끝없이 늘어선 주차 행렬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걱정도 되었지만, 문턱 높은 문경 봉암사의 희소가치가 여기서 다시 되새김질 되는 대목이다. 덕분에 우리는 20분쯤 가면 되는 희양산 산행 기점인 은티마을까지 무려 40분이 걸려 도착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끝없이 이어진 인파와 차량 행렬을 뒤로하고 우리는 산행을 위하여 여유롭게 차를 돌려 나갔다. 나가는 길에도 끝없이 이어진 차량 행렬을 보면서 오늘 새벽 일찍 서두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 한 톨 더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옛말 그릇된 것 하나 없다.


아쉽지만 봉암용곡과 마애보살좌상 그리고 성현들의 가르침이 흠뻑 젖어있는 동방 제일의 수도 도량인 봉암사를 떠나 우리는 또 다른 기다림이 있는 희양산으로 간다. 희양산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지 또 어떤 매력 있는 들꽃이 우리를 반길지 자못 기대하며 길을 떠난다.


 

 

 

 

 

 

 

사진으로 보는 봉암사 기행

 

 

 

4시에 일어나 꾸물거리다 5시에 출발하여 그래도 7시 이전에 도착을 했다. 이미 희양초 운동장은 만차가 되고 오가는 도로 한 방향에 경찰과 봉사단체 회원이 주차 안내 및 관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셔틀버스를 타러 간다. 아직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으나 곧바로 미어터진다.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는 봉암용곡의 물길은 원북리를 따라 흐르고 봉암사 뒷편엔 구름에 쌓인 희양산 봉우리가 거인 같은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다.

 

셔틀버스를 타고 봉암사 초입에서 내려 봉암사까지 10여 분 걸어 올라간다. 왼쪽 희양산과 오른쪽 구왕봉을 바라본다. 여기서 바라보이는 뒤쪽이 오늘 희양산을 산행할 기점인 은티마을이다. 봉암사에서 은티마을까지는 승용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다. 은티마을에서 오르는 등로는 개방되어 있으나 봉암사 쪽에서는 등산로가 완전 폐쇄되어 있으며 건너편 은티마을에서 봉암사로 내려오는 길도 모두 차단되어 있다.

 

봉암사 유래는 사진으로는 읽기 어려우니 서두에 기술한 '봉암사 개요'를 참조하면 됩니다.

 

입구에 서있는 키 큰 나무에 색바랜 하얀꽃이 피어 있어 이곳에서 탐방객을 안내하는 스님께 여쭈어보니 후박나무란다. 전라도 조도의 조도중 분교에 있는 몇 백년 묵은 고목인 천연기념물 후박나무를 본 기억이 새롭다. 우리 후박나무가 아니라 후박이라고 하는 일본목련이라고 하네요.

 

'희양산봉암사' 일주문. 뒷면에는 봉황문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일주문은 2012년 2월 6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남무아미타불.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디다만,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에게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무방하리라 봅니다.

 

봉암사 가람 배치<펌> 

 

 

봉암사 가람 배치의 최남단 중앙에 자리 잡은 기본선원 남훈루.  

 

오른쪽이 공양간이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지만 공양간을 보니 배가 출출하다. 사진 한장 찍고 줄지어 서있는 끝에 섰더니 스님이 나까지 공양간 안으로 들여 보내고 문을 닫는다. 이것도 행운일까? 1년에 단 하루 개방하는 봉암사에서 아침 공양까지 했으니^^^ 그런데 아내를 부를 여유가 없다. 휴대전화도 안 터진다. 청정산문이라 문명의 이기마저 차단되어 있는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혼자 먹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아내는 쬐금 섭섭해 한다. 자기는 나랑 함께 먹을려고 찾아 다녔는데 혼자 먹었다고... 

 

동방장.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 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가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고 한다.

 

보림당. 선방과 주지실 등이 있는 전각

 

극락전. 극락전은 목탑 형으로 건조되었으며, 경순왕이 피난 시절에 원당으로 세운 유서 깊은 전각으로 여러 번 중수를 하였다.

 

 

산신각. 사찰에 오면 산신각은 괜히 피해 다니고 왠지 사진도 찍기 싫어 지금까지 내가 찍은 사찰 사진 중에 봉암사 산신각을 처음 찍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이젠 산신각도 낯설지 않다. 

 

백당나무 맞나. 5월의 싱그러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대웅보전. 정중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희양산을 주산으로 한 대웅보전은 1992년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초파일 관불의식. 부처님 오신 날 아기부처님을 목욕시키는 관불의식으로 새로운 삶으로의 재 탄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공조팝나무인가요.

 

불두화. 백당나무에서 생식기능을 없애 버린 꽃나무가 불두화라고 한다. 모든 나무의 특징은 백당나무와 같고 다만 꽃에서 암술과 수술이 없어지고 꽃잎만 겹겹이 자라게 한 원예품종이다. 재미있는표현을 하자면 백당나무의 고자가 불두화란다. 멀리서 보면 꽃의 모양이 마치 불상의 머리를 닮았으며 부처가 탄생한 사월초파일을 전후해 만발하므로 불두화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무성화이며 꽃덩어리가 밥을 담은 사발과 같다하여 사발꽃 혹은 밥꽃이라고도 한다. 북한에서는 큰접시꽃나무라고 부른다. 

 

연등이 수를 놓은 대웅보전 앞 마당. 경내에는 아직 연등을 달 자리가 많이 비어 있다. 곧 하얀 연등이 바람을 타고 살랑거리며 봉암사 경내를 잔잔한 파도로 일렁이겠지. 

 

오늘 만큼은 중생들에게 마음껏 허락된 공간이다. 얼마나 많은 불자들이 이 법당 안에 들어와 예를 취하고 싶었을까. 오늘 하루 마음껏 예를 드리고 소원을 빌어보자. 

 

봉암사 지증대사탑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지증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적조라 하였다고 한다. 지증대사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인 형태다.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비문은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석혜강이 썼다.

 

석조부재

 

매발톱

 

조사전.  어느 사찰이든지 조사전은 그 절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라고 한다. 조사전은 가구식 기단 위에 앞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식 건물이고, 조사당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고 부처의 가르침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조사당 삼면 벅에는 태고 보우스님을 비롯하여 봉암사를 지켜온 역대 조사스님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근래의 조사로는 향곡스님과 서암스님의 영정이 있다. 

 

묘유문.  묘유문(妙有門)은 평범함은 성스러움이 되고 진공(眞空) 속에 묘유(妙有. 지혜)가 생겨난다고 한다.

 

봉암사 희양산문 태고선원.  조계종 종립선원인 태고선원 입구에 이 문 안에서는 알음알이를 내지마라(入此門內莫存知解)는 주련이 있다. 이는 참선 시 글이나 말씀만을 외우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행위는 무익할 뿐 참선에 장애가 돼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는 뜻이다.  

 

봉암사 희양산문 태고선원 요사.

 

전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봉암사의 꿈’은 성철스님의 나이 36살 때인 1947년 가을 실현에 옮겨졌다. 해방 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름 하여 '봉암사 결사'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금색전.  금색전은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수행승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며 지증대사가 대중을 이끌고 와서 절터의 화룡점정으로 삼은 곳이 바로 이 금색전이라고 한다. 

 

금색전이란 금색인을 모시는 집이며 금색인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색전은 불타 없어진 것을 1955년에 다시 세운 전각이라고 한다. 불상 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수염을 휘날리며 호위하고 있고 위에는 지혜의 문수보살과 실천행의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코끼리와 사자가 올라 앉아 있다. 법당에는 통견차림으로 지권인을 한 화엄경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봉암사 3층석탑.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는 보수 중이라 아쉽게도 상륜부를 볼 수 없다. 

 

<펌> 봉암사3층석탑.  위 보수 사진과 비교차 퍼옴

 

범종각 목어 木魚 :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목어는 수생동물을,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진 운판은 허공을 나는 날짐승을 위해서 친다. 아침과 저녁 예불시간에 맞추어 치는데, 아침에는 목어를 먼저, 저녁에는 운판을 먼저 친다.

 

 

병풍처럼 드리워진 희양산의 정기를 받으며 나를 완전히 비운 상태로 잘못된 마음을 바로 잡는 수양 공간이다.

 

이제 마애보살 좌상(지방문화재)이 계신 곳으로 간다. 봉암사 경내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저기 흐르는 물길너머 마애보살 좌상이 보인다. 부지런한 많은 사람이 벌써 봉암용곡이라 불리우는 계곡에서 노닐고 있다.  

 

 

 

 

마애보살 좌상(지방문화재).  이 불상은 환적의찬 선사의 원불인데, 평소에 발원 기도하는 부처님 또는 보살이라고 전해오며 조각 연대는 고려말기로 추정된다. 높이는 4.5m, 폭이 4.4m인데 불두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 닷집 혹은 집 모양의 장엄물 처럼 만들었으며 광배, 후광을 겸하는 듯하게 처리 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꽃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말기의 양식과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멸실된 곳이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 마애보살 좌상은 매년 초파일 봉암사의 절문을 열 때 마다 참배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아오고 있다. 

 

봉암사를 둘러싸고 있는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 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계곡에는 수정같이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즐비하여 거니는 발걸음이 지겹지 않다. 

 

마애보살 좌상 옆에 있는 거대한 바위는 봉암사 경내에 있어 봉암사 백운대라 부르기도 하며 물빛과 돌 빛이 옥과 같다 하여 옥석대 라고도 한다. 불상 옆 바위에는 백운대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선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른다고 해서 봉암사 인근 계곡을 봉암용곡 이라고도 한다.

지증대사는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차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어 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며 경탄했다고 하는 곳이다. 오늘 나는 봉암사 봉암용곡에서 뜨거운 5월의 봄날을 신선놀음하듯 시원하고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있다. 이보다 더 부러울 것이 없다. 

 

 

 

봉암용곡의 옥빛 물결과 시원한 골바람을 뒤로하고 마애보살 좌상을 떠나 다시 봉암사 경내로 돌아 온다.

 

불자와 탐방객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뒤쪽에서는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한다. 아침 공양 때 먹을 만큼 반찬을 가져왔는데 조금 남는다. 버리기 거시기 해서 그냥 다 먹어 치웠더니 입이 꽤나 짭다.   

 

잎 모양이 선명하지 않으나 나무수국은 아닌 것 같고 역시 불두화 같다.

 

봉암사에서 근 3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아침에 셔틀을 탔던 곳에 오니 늦게 도착한 사람들의 행렬이 보시는바와 같이 장난이 아니다. 물론 사진에 보이는 행렬이 전부가 아니며 끝없이 많은 사람들로 이어져 있다. 차량도 한쪽 차선이 완전 점령 당했으니 우회하거나 경찰의 수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일찍 서둘러 편안하게 구경했지만, 가면서 보니 도로변에 주차된 차량 행렬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아마도 늦게 온 사람은 고생을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행렬의 끝이 안보인다.

 

미루어 두었던 봉암사 탐방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는 희양산을 가기 위해 은티마을로 향한다.

희양산은 우리 부부를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반겨줄지 궁금하며

 또 어떤 들꽃을 보여줄런지 자못 기대가 된다. 가보자 희양산으로...

 

 

 

부처님 오신 날 봉암사 갈 때 이것만은 알고 가자.


1. 산문개방 : 당일 오전 7시부터 ~ 오후 7시 까지 참배하실 수 있습니다.     (7시까지 퇴장)

2. 참배범위 : 봉암사 경내(법당)만 참배가 가능하며, 산중 암자는 참배가 불가 합니다

3. 금지복장 : 등산복, 미니스커트, 반바지, 나시(민소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착용할 시 출 입이 금지되오니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4. 승 용 차 - 승용차는 일체 출입 금지되오니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본 사찰 입구에서 경찰이 차량통제함)

봉암사 입구(희양초등학교 운동장)에 임시주차장을 마련하였으나, 주차장이 협소한 관계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편이 유리합니다.

당일, 희양초등학교에서 본 사찰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할 예정입니다

(승용차는 일체 출입이 금지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