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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방

미수에 그친 괴산 칠보산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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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찾아 헤매다 미수에 그친

괴산 명산 칠보산 산행기

 

■ 언제 : 2013. 8. 1.(목)

■ 어디로 : 칠보산(七寶山·778m·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 누구랑 : 처가 식구와 함께

■ 산행코스 : 각연사 - 통합대사탑비 - 활목고개 - 칠보산 - 청석재 - 각연사

      원점으로 돌아 나오는 코스로 3시간 30분 정도 예상했으나 많은 비로 등로가 유실되어 예정대로 산행을 하

      지 못했다.

      칠보산 산행은 대부분 쌍곡 계곡의 제3곡인 떡바위에서 시작함이 무난하다.

 

 

 

흔적

 

  서울을 비롯한 강원, 경기, 중부이북지방은 긴 장마로 연일 물대포와 맞서 씨름을 하고 있지만, 내 고장 대구는 비는 커녕 불볕더위와 전쟁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모두 더위를 피해 바다, 계곡, 강가로 피서를 나가는가 하면 아예 꼼짝없이 방안에만 콕 박혀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궁여지책으로 처가에 베이스캠프를 치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즈음 날씨 같으면 처가만큼 좋은 곳도 없을 것 같았다. 우선 ‘괴산35명산’도 탐이나고, 산만큼이나 쌍곡구곡과 같은 빼어난 계곡이 즐비하니 산도 타고 계곡 트래킹도 즐길 수 있는 이곳이 올여름 피서지로는 맞춤형 도시탈출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틀 밖에 여유가 없는 딸내미와 함께 이것저것 우리 먹을거리는 우리가 준비해서 당장 처가로 향하였다. 딸내미는 다음날 충주공영버스터미널에서 혼자 올려 보내기로 하고 우리는 더 머무르다 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처가에 당도하니 미리 온 처남과 처조카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서로 반갑게 해후를 하고 점심을 챙겨 먹은 뒤 늦으나마 형편에 맞추어 괴산이 자랑하는 일곱 개의 봉우리가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명산 칠보산을 찾았다. 스마트폰으로 대충 검색을 해보니 칠보산 산행은 쌍곡구곡의 제3곡인 떡바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였으나 출발 시간이 늦어 한 바퀴 휘둘러 나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각연사를 기점으로 짧게 돌아 나오면 시간이 적절할 것 같아 각연사를 시작으로 짧게 산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코스는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에 위치한 천년고찰 각연사를 품고 있고,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통일대사탑비를 마주할 수 있다.

 

  각연사 등로 초입에 들어서니 친절하게 등산안내지도가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각연사를 기점으로 제일 짧은 코스로 돌아 나올 때 대략 4시간쯤 걸린다고 표시되어 있다. 요즘은 해가 길어 산행 시간이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산행길에 나섰는데 아뿔싸 오늘 산행 일진이 별로 달갑지만은 않다. 계곡은 청정지역이라 지금까지 본 계곡 중 가장 으뜸이었지만, 쏟아진 폭우로 인하여 산행길이 끊어졌는지 그만 보이지 않는다. 계곡을 이리 넘고 저리 넘어 가까스로 길을 찾아 올라가면 또 길이 끊어져 있어 더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는 수 없이 산행을 포기하고 꿩대신 닭이라고 산보다 좋은 청정계곡에 몸을 담아 칠보산 산행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각연사 계곡은 말 그대로 산림이 우거진 청정계곡 그 자체였다. 인근에 있는 쌍곡구곡은 땡볕에도 불구하고 진저리를 칠 만큼 많은 피서객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각연사 계곡은 초입에만 한 가족이 발을 담그고 있을 정도로 한산하였다. 쌍곡구곡과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괴산 일대는 쌍곡구곡과 선유동계곡 같은 워낙 유명한 계곡이 많아 각연사 계곡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통일대사탑비로 해서 활목고개로 올라가는 길에 사람이라고는 우리 일행밖에 없다. 그러니 이 계곡은 우리가 전세를 낸 것이나 다름없다. 우린 가족이고 사람이라고는 우리 일행 외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으니 칠보산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티 없이 맑은 계곡물에 입수하여 부족함을 채우기엔 그저 그만이다.

 

  아내는 옷을 입은 채로, 처조카와 나는 상의를 벗어 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담갔다. 땀방울이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지던 몸뚱어리를 차디찬 계곡물에 담그니 언제 그리 더웠느냐는 둥 온몸은 벌써 한기를 느끼며 팔뚝에는 닭살이 내리 앉는다. 산을 다닌 이후로 이렇게 홀가분하게 계곡에 몸을 던져 보기는 처음이다. 그저 아내랑 투박한 등산화에 꽉 조인 양말을 벗고 달아오른 두 발을 잠시 담가 보기는 했어도 오늘만큼 이렇게 온몸을 던져 보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산행하는 사람도 나물 캐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으니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각연사 계곡

이 더위가 가기 전에 GB산악동아리 회원들을 데리고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 마땅히 갈 곳 없는‘GB산악동아리’회원들은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할 것 같다. 더운 날 1정자격연수를 받느라 고생했을 젊은이들 그리고 휴가 중에도 불구하고 각종 교육활동을 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니 꼭 이곳을 다시 한번 데려오고 싶은 생각이 든다. 모두 올여름 더위의 맹폭에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나. 이 더위가 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더위를 즐기도록 해 주어야겠다. 각연사의 차디찬 계곡에 몸을 담가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의 불쾌함을 말끔하게 씻어 주어야겠다.

 

 

 

 

 

칠보산 각연사 기점 똑딱이 사진 기행

 

8월 1일 늦은 시간에 처가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칠보산 산행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늦은 만큼 그 시간에 맞추어 칠보산 산행을 하자니 각연사에서 짧게 돌아 나오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아 각연사를 기점으로 삼았다. 각연사에 당도하여 등산로를 살펴보니 들머리에 칠보산 산행지도가 친절하게 세워져 있다. 그래서 의심없이 안내지도에 따라 각연사-통일대사탑비-활목고개-칠보산-청석재-각연사로 방향을 잡고 산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통일대사탑비로 해서 활목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연일 내린 폭우로 인하여 등로가 끊어져 길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칠보산 산행을 실패하고 내려와서 정리를 하다보니 차라리 각연사에서 청석재로 올라 칠보산 정상에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오는 경우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거나 칠보산 산행은 쌍곡구곡의 3곡인 떡바위를 기준으로 산행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각연사 어귀의 계곡에는 노루오줌이 군락을 이룬채 활짝 피어 있다. 

 

각연사.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 각연사 (태성리)

 

각연사 비로전.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으로 이곳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을 모시고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주춧돌은 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기둥은 가운데만 약간 굵게 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각연사 비로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단아하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보이고 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의 상투 모양 머리(육계)는 펑퍼짐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옷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다리부분의 옷주름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었다. 이런 표현은 얼굴모습과 함께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4호)과 직결되는 것이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은 매우 어색한데, 이것은 왼쪽에만 걸쳐 입은 옷과 함께 불상의 오른쪽을 더욱 허술하게 만들고 있다.
불상의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듯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물방울 모양이다. 광배를 살펴보면 불상의 머리 위쪽과 불상 양쪽으로 각각 3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졌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신라 전성기의 전형적인 불상처럼 긴장된 활력과 세련된 기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화려해진 모습을 보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 <펌. 사이트 문화재청>

아빠와 아~들. 좋은 일들만 항상 가득하기를...

 

각연사에서 시작하는 산행 들머리. 지금은 의심없이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연일 내린 폭우로 인하여 계곡은 습하고 음기가 엄습해 오나, 인적이 드물어 산을 이루는 숲과 계곡에 흐르는 물은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다. 

 

각연사 부도탑. 

 

통일대사탑비와 청석재로 가는 갈림길. 차라리 여기서 청석재로 갔더라면 칠보산 정상은 다녀왔을 것 같은데 통일대사탑비로 가는 길은 등로가 끊어져 길을 찾기가 어렵다. 

 

위 갈림길에 있는 이정표. 청석재가 그리 멀지 않건만, 아쉬움만 가득하다. 대신 계곡 좋고 물 좋은 곳에 사람이 없는 곳 그야말로 청정계곡이 있음을 알았다. 숨겨진 보물 같은 곳.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비로, 각연사 동남쪽의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대사는 고려 전기에 중국유학을 다녀온 이로, 그가 왕실에서 불교의 교리를 강의하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다. 거북받침돌은 등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로 바뀌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오면서 나타나게 되는 양식상의 특징이다. 비몸에 새겨진 글씨는 해서체인데, 원래 새겨진 3,500자 가운데 현재는 대부분이 깍여 260자 정도만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머릿돌의 네 면에는 4마리의 용을 웅장하게 새겨 놓았는데, 그 용들이 머리를 들어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받도록 하였다.
원래의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몇 안되는 석비중의 하나로, 고려 광조 9년(958)에 건립되었다. 받침돌에 새긴 거북머리의 양식상 변화나 각 부분에 새긴 조각수법은 당시 석비의 우수함을 잘 보여준다.

<펌> 문화재청 

 

길을 못 찾아 산행은 포기하고 계곡에 몸을 담고 알탕을 했던 곳. 

 

 

 

 

 

 

 

각연사 감로수

 

 

 

 

각연사 정원에 있는 톱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