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가산의 설국은 봄꽃보다 아름다웠다.
■ 언제 : 2014. 2. 9.(일)
■ 어디로 : 팔공산 가산산성
■ 누구랑 : 아내
■ 왜 : 눈밭에 핀 복수초 만나러 갔다가 하얀 설국을 만났다.
■ 산행 거리 : 왕복 대략 10km
흔적
지금 경북 북부 지방과 강원도 동해 일원은 근 5일간 내리고 있는 폭설로 크나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우리 부부가 강원도 선자령과 정선에 있는 민둥산 눈꽃 산행을 감행했을 당시는 산정에 쌓인 눈 더미 외에는, 기대했던 눈꽃과 상고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우리가 방문했던 그곳에는 엄청난 양의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방송이 전파를 타고 전국을 강타한다. 이 때문에 강원도와 경북 북부 지방의 국립공원은 입산금지 조처가 내려지면서 산행이 전면 통제되고 휴업하는 학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환상적인 눈꽃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눈 폭풍을 맞은 지역 주민이 헤쳐나갈 고난을 생각하며 적당히 자중자애해야겠다.
내 사는 곳은 눈이 온 듯 아니온 듯하여, 아예 눈꽃은 기대하지 않고 복수초나 찾아볼 겸 팔공산 가산산성으로 가벼운 산행길에 올랐다. 강원 영동지방은 눈 폭풍으로 인해 난리가 났지만, 우리 고장은 눈 구경 좀 했으면 하는 곳이라 눈꽃 산행은 애당초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그저 강원 영동에서 저주하듯 퍼붓는 눈을 우리 지역의 팔공산에나 나누어주지 하는 아쉬움과 운이 좋다면 ‘복수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성 나들이길에 나섰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주차장엔 이미 만차가 되어 주차 형편이 좋지 않다. 겨우 빈자리 하나 찾아 주차하고 진남문으로 들어서니 진남문 주변 성곽 여기저기에 시산제를 지내느라 모두 분주하게 움직인다. 부부 주말산행을 근 4년 정도 다녔지만, 가까운 곳에서 여러 팀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산제를 지내는 모습은 오늘 처음 본다. 돼지머리와 떡, 과일, 포를 진설한 예사롭지 않은 상차림을 보며, 산을 자주 찾는 우리도 뭔가 흉내를 내야 할 텐데 라는 우려가 생긴다. 염치없지만, 시산제를 하기 위해 상차림한 곳에 우려되는 마음을 살짝 올려놓고 간다.
가산산성을 오면 난, 항상 진남문 좌측 성곽을 따라 남포루가 있는 곳으로 가산바위를 오른 후 중문과 동문을 거쳐 임도를 따라 편안하게 내려온다. 내가 즐겨 애용하는 가산산성의 정규코스라고 보면 된다. 특히 남포루에서 가산바위 가는 성곽길은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개체의 들꽃을 볼 수 있어 더욱 선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은 좀 편히 가기 위하여 늘 가던 길로 가지 않고 걷기 좋은 임도를 따라 올랐다. 임도로 가는 초입은 눈꽃 풍경과는 거리가 멀어 겨울 진경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초입에서 결코 멀지 않은 불과 10여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도달하니 아랫동네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설원과 나뭇가지에 맺힌 맑은 눈꽃이 따사로운 햇살에 투영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위로 갈수록 눈꽃과 상고대가 어우러진 모습까지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욱이 가면 갈수록 눈으로 뒤덮인 백설 같은 장면이 더 짙어지니 예기치 않던 행복을 누릴 가능성은 더 많아진다.
오늘 가산 산행길은 그동안 전국의 유명한 설산을 다니며 적당히 실망했던지라 큰 기대를 하고 떠난 것은 아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그러려니 하고 떠난 산행길에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니 그저 황홀하기만 하다. 일찍이 산행하고 내려오던 산객 한 분이 감탄을 연발하고 있는 우리 부부를 보더니 위쪽 상황을 소상하게 알려주신다.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동문을 지나면 그야말로 더욱더 환상적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아니나 다를까? 동문이 가까워지니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설국의 세계가 판타스틱하게 다가온다.
뜻밖에 이 무슨 횡재인가 싶다. 영동지방의 폭설로 인해 몸서리칠 주민을 생각하면 다소 죄송한 마음이 드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앞뒤 분간 없이 마냥 황홀하기만 하다. 내 고장 대구에서는 쉬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닌 만큼 더욱더 그런 기분이 든다. 더구나 올해 겨울은 예년과 달리 겨울 산행의 묘미를 느끼기 위해 눈꽃산행으로 유명한 산만 일부러 골라 다녔다. 그 덕분에 겨울 산이 주는 풍요로움을 많이도 보고 즐겼지만, 겨울 산의 백미라 일컫는 눈꽃과 상고대의 환상적인 조합은 아쉽게도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진풍경을 오늘 내 고장 가산산성은 마치 우리 부부를 위한 듯 원 없이 보여준다.
흔히 겨울 산의 최상의 조합은 눈꽃과 탁 트인 조망 그리고 잔잔한 바람과 청명한 하늘을 꼽는다. 겨울 산을 많이 다녀봤지만, 웬만해서는 이런 환상적인 궁합을 만나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절묘한 조합을 만난다. 올 겨울에는 이제 ‘볼 것 다 봤다.’고 여겼는데 가산산성 동문에서 가산바위로 가는 길은 그동안 겨울 산행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보상이라도 하듯 겨울 산의 진가를 모두 보여주었다. 산에 좀 다녀봤다고 치부하지만, 겨울 산이 언제 산객의 기호에 맞춰 세 박자를 모두 갖추어 주던가? 단언컨대 결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문득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최고의 걸작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안견의 진작(眞作)인 몽유도원도가 생각남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도취된 산객의 과장된 표현이려나. 안평대군의 꿈결에 나타난 몽유도원을 안견이 인간 세상과 신선이 사는 세상으로 분류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린 것처럼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풍경을 화폭에 담을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곁에 그림 잘 그리는 미술을 전공한 친구를 대동하고 다녀야겠다.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그리라고 한 것처럼 친구 녀석에게 보이는 대로 느낌을 전하며 그려보라고 해야겠다. 어찌 알겠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대작이 탄생할지^^^
오늘 산행은 의외의 수확으로 인해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실상은 세계 최대의 복수초 대 군락지를 찾아 혹여 얼어 붙어있는 눈을 뚫고 노란 잎을 활짝 펼친, 봄을 알리는 전령을 만나고자 함이었는데 의도한 바와 상관없이 이국적인 풍경의 설국을 만나 환상의 나래를 마음껏 펴고 왔다. 꿩 대신 닭이라더니 복수초는 눈에 덮여 종적을 찾을 길 없었으나, 그보다 더 예쁜 보석 같은 눈꽃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따라 환상적인 설국에 도취된 아내가 탄성을 자아내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무척 상큼하고 발랄해 보인다.
오늘은 복수초보다 눈꽃이다. 올 겨울 눈꽃은 2013년 12월의 팔공산 동봉과 2014년 2월 초순의 팔공산 가산산성을 마지막으로 마감할 것 같다. 눈꽃의 시작과 끝을 내 고장 팔공산에서 마감하게 되어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다. 팔공산을 가까이 두고 사는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
가산바위 가는 길(스마트폰 파노라마 사진)
똑딱이로 본 은빛 설국 기행
오늘이 무슨 날인가? 진남문 앞에 시산제를 지내는 팀들이 많이 모여 있네요.
우리는 시산제와 무관하게 다니고 있는지라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마음만 살짝 올려 두고 간다.
통일기원국조단군상.
초입에 이르러 임도로 가지 않고 바로 치고 올라간다.
어라, 20분 쯤 올라오니 초입과는 어째 분위기가 달라진다. 등로에는 눈도 제법 쌓여 있고 나뭇가지에 눈꽃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계곡을 뒤덮은 바위 위에도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다.
설국 속으로 나래를 활짝 펼치고 들어가는 아내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갈수록 아랫동네와는 달리 설국의 세계로 안내한다.
당단풍에 맺혀있는 눈꽃이 장관이었는데 사진으로는 보이는 만큼 담지 못했다.
가녀린 나뭇가지에 새하얀 상고대가 맺혀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갈수록 겨울산의 진풍경이 드러난다.
올 겨울에 다닌 눈꽃 산행 중 최고 진경이다.
아내도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이 시린 것도 잊은 채 연방 스마트폰을 눌러댄다.
덕유산, 지리산, 선자령에, 민둥산에서 이런 장관을 보고 싶었는데 눈꽃은 간 곳 없고 쌓인 눈만 잔뜩 보고왔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오늘 '계'탔다. 가산에 오면 혹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지만, 정말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문 오솔길 방향으로 가면서 본 장면이다. 보이는 만큼 사진이 아름답지 않아 아쉽다.
여기도 복수초 군락인데 눈에 덮여 폈는지 안폈는지 알 수가 없다.
뭐라 표현해야 하나. 너무나 환상적이다.
말이 필요없다. 지금부터 펼쳐지는 그림은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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