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 2020. 6. 6.(토)
■ 어디로 : 지리산 노고단
■ 누구랑 : 아내랑
흔적
올해 지리산은 처음인 모양이다.
노고단이라도 가고 싶다.
봄꽃 지고 여름꽃은 이른지라 꽃에 대한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다만 얼마 전 누군가 보고 왔던 복주머니란에 대한 기대는 없지 않았지만,
시기를 약간 놓친 것 같아 그 마저 큰 기대를 한 건 아니다.
성삼재 휴게소 인근 산복도로에 주차된 차량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꼬리가 너무 길어 꽁무니에 갖다 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무조건 주차장으로 갔더니 요행히 우리 차를 마지막으로 만차가 되어 버렸다.
운이 좋다는 생각에 평소 주차비가 너무 비싸 푸념했던 마음이 다 사라졌다.
생각했던 대로 초입부터 꽃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붉은병꽃나무와 눈개승마, 매미꽃 정도가 다였다.
지난번 봤던 곳에 세잎종덩굴이 피었나 봐도 보이지 않는다.
아내와 난 힐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늘은 지리산에서 그저 푹 쉬고 싶었다.
꽃이 없어도 좋고 새가 보이지 않아도 좋다.
지리산이 있고 그 속에 아내와 내가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다.
첫 번째 갈림길에 들어서는데 분홍빛 짙은 큰앵초가 보인다.
지리산에서 큰앵초는 처음 본다.
큰앵초가 피는 시기에 온 적이 없어 지리산에 큰앵초란 애가 피는 줄도 몰랐다.
조짐이 좋다.
그렇지 않은가? 기대하지 않았다가 뜻밖의 선물을 받는 그런 희열감
그건 느껴본 자만이 안다.
오늘 노고단은 대체로 구름이 많다.
지리 능선도 반야봉도 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구례와 섬진강도 구름에 갇혔다.
노고단까지 오가는 길에선 늘 보던 아이들하고만 말을 썩었다.
지금 이 길엔 미나리아재비와 쥐오줌풀이 대세다.
여기까지 와서 보는 이 녀석들은 반갑지도 않다.
그도 그런 것이 어디 가도 흔한 애들이라 당연할 만도 하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시선은 예리하게 주변을 놓치지 않는다.
산에 오면 이젠 이런 행동이 몸에 뱉다.
그 덕에 쥐방울보다 작은 구슬붕이를 찾았다.
큰구슬붕이인지 봄구슬붕이인지 헷갈리지만
다른 곳에선 잘 안 보이던데 내가 본 그 지점에서만 보였다.
눈여겨 살펴본 댓가이리라.
그런데 구슬붕이가 문제가 아니다. 저기 뭔가 있다.
기대는 크게 안 했다지만 실상은 아직은 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던 그 녀석이 보인다.
복주머니란! 일명 개불알꽃이라 불리는 녀석이다.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예상했던 바다. 아직 꽃이 남아 있다면 예쁜 모습을 보진 못하리라 여겼지만,
그래도 생각보단 상태가 나쁘진 않았다.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만면에 희색을 머금고
요모조모 특징을 잡아 촬영을 했다.
노고단에 온 것만도 좋았지만 정작 복주머니란을 품에 안고나니
비로소 할 일을 다했다는 포만감에 사로잡힌다.
아내는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득의양양한 채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한 달음에 달려가니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왜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지 아나"라며
더위에 지친 날 위해 마치 시원한 아이스크림 하나 건네줄 듯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왜"
"이거 봐라"
"뭐" "뭐꼬"
"저기"하며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다가 그만 기절초풍할 뻔했다.
조금 전 보고 왔던 복주머니란 한 다발이 풍선처럼 부풀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봤던 거랑 아예 비교 불가다.
올라갈 때 분명 사방을 다 살폈는데 눈에 띄지 않았다.
잡풀 사이 그 조그마한 구슬붕이도 찾았는데 이 녀석을 못 봤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아내가 발견하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따라 아내가 왜 그렇게 이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10여 년간 전국에 있는 산을 헤집고 다녔어도 이토록 건재한 복주머니란은 본 적이 없다.
야생에선 강원도 두문동재에서 대덕산을 넘어갈 때 상태가 한 물간 복주머니란을 본 이래 처음이다.
청양 고운식물원에서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을 전시한 것은 보았어도
야생에서 이렇게 튼실한 모습을 본 건 처음이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혹시 촬영 미숙으로 사진이 잘못 나오지나 않을까 우려되어
수십 컷을 찍고 또 찍었다.
다 찍고 집에 와서 보니 한 장도 버리기 아깝다.
노고단이 준 뜻밖의 선물이다.
늘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고 온 적이 한두 번 아니기에
오늘 같은 날이면 정말 희열감이 크다.
이 귀한 걸 찾은 아내한테 체면불구하고 입을 쪽 맞춰주고 싶다.
할 일 다했다는 뿌듯함에 이젠 지리산을 즐기고파 일찍 내려가기 싫어진다.
올라왔던 지름길로 가지 않고 빙둘러 가는 길로 내려갔다.
늘 다니던 길보단 일부러 느릿느릿 가고 싶었던 것이다.
지리산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기분이 좋아 그런지 발걸음조차 가벼워졌다.
구름이 밀려오면 구름을 벗삼고 바람이 불면 바람과 동무했다.
그렇게 지리산의 일부가 되어 콧노래하며 가노라니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없다.
게다가 이건 또 무슨 횡재수인지
수풀 사이로 진분홍빛 큰앵초가 눈길 가는 곳마다 인사를 건넨다.
영양 일월산에서 본 것 만큼이나 개체 수가 많다.
이 녀석은 꽃도 마치 색감을 더해 덧칠을 한 것마냥 붉디 붉다.
오늘 지리 방문길엔 야생화를 크게 기대하고 온 건 아닌데 뜻밖에 수확이 크다.
꼿꼿하게 꽃을 피운 물참대도 노린재나무도 꽃이 예쁘게 폈다.
올라올 때 꽃망울을 머금고 있던 함박꽃나무도 전부 꽃문을 활짝 열었다.
마치 노고단을 찾아 주어 고맙다며 잘 가라고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주차비가 7,700원 나왔다.
오래 머물렀기에 많이 나왔을 것이다.
우린 노고단에 오면 다른 사람보다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 주로 이 정도 주차비를 낸다.
비싼 주차비를 물고선 늘 푸념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주차비가 아깝지 않다.
주차비를 징수하는 사람한테 기분 좋게 카드를 내밀었다.
뱀사골 부근엔 식당이 많다.
오늘은 기분도 좋고해서 아내한테 뭐 맛있는 거 먹고가자며 전망 좋은 식당에 차를 세웠다.
우리가 지리산에 와 인근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산나물 비빔밥 맛도 아주 좋았다.
식당에 들어가지 않고 산딸나무가 환하게 핀 물가에 자릴 잡고선 맛있게 먹었다.
구경 잘 하고 밥 맛있게 먹고 길을 나서는데
주절주절 비가 내린다.
타이밍도 기가 막힌다.
노곡단고개. 저 문을 나서면 지리 종주 길에 들어선다.
초입부터 녹음이 우거진 길이지만, 오늘따라 시원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고 좀 더운감이 있다.
붉은병꽃나무에 꽃이 만발하니 어두운 계곡이 환하게 살아난다.
노고간대피소. 여기서 웬 젊은 국공직원한테 복주머니란의 상태에 대해 물어보니 다 지고 없단다. 나도 그렇게 예상했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웬걸 그게 아니었잖아. 이 젊은 친구 모르면 모른다고 안다면 아는대로 좀 정직하게 얘기해 줄 일이지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구만...
많이 보던 사람인데 어딜 가시나.
지금까지 노고단에 그렇게 왔어도 선도샘에서 물 한 방울 마신 적이 없는데 오늘은 물 한 통 채워가기까지 했다. 물 맛이 기가 막히더라만 그동안 이 물을 외면했다니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저기까지는 보통 사진만 찍고 가끔 한 번씩 꽃이 뭐 없나 둘러보곤 한다.
뒤돌아 보는 경관이 장관이라 이 지점에 서면 습관처럼 사진기를 들이댄다.
노고단 정상이 보인다. 이 길이 천상화원인데 지금은 꽃궁기 틈바구니에 있는 애들만 주로 보인다.
쥐오줌풀이 대세를 이루고
저기 노란꽃이 보이는 애들은 모두 미나리아재비다. 지금 이 길엔 애들이 대세다.
노고단 가는 길에 선 구상나무 한 그루. 요즘 기후 온난화로 인해 우리나라 고산에 있는 구상나무가 수난을 겪고 있는데 이 나무는 천년만년 무사하기를 기대해 본다.
전망대에 서면 구례 전경과 섬섬옥수 같은 섬진강 잔물결이 보이건만 구름이 밀려와 볼 수가 없다.
점점 짙어지는 구름. 산에 오면 나는 이런 분위기가 좋다.
보이는 게 쥐오줌풀이고 미나리아재비다.
노고단 표석에서 사진 찍느라 줄을 서 있다. 우리는 패스...
우리는 지금 하늘에 떠있는 구름 속에 들어있다. 여기 있으면 안개고 아래서 보면 구름이겠지.
만복대도 구름에 가렸다.
고산 초원과 쥐오줌풀
이게 뭐니? 늦은 줄 알았더만, 이렇게 싱싱하게 펴 날 기쁘게 해 줄줄이야... 오늘 난 너 때문에 너무 행복했다. 고마워. 너도 오래오래 꽃을 피워 오가는 사람들 즐겁게 해주려무나.
요 녀석만 아직 싱싱하게 남아 있다. 대부분 다 졌던데...
올라오면서 몇 개체 만났을 뿐인데 돌아서 내려가니 엄청 많더만... 큰앵초 너랑도 많이 했다.
큰앵초. 색감이 마치 덧칠을 해 놓은 것 같다. 덧칠 no!, 원색 ok!
남자 화장실에 붙어 있는 지리 종주능선. 어줍잖은 산행 솜씨지만 그래도 구역을 나누어 저 봉우리를 모두 올라봤다.
하산해 주차장에서 아쉬움에 한 컷. 또 보자. 지리야!!! 지리터리풀이 길섶에 채일 정도로 무성할 때 또 올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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