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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방

옥포 송해공원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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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옥연지 송해공원

산 능선을 넘어 호수 둘레길 한 바퀴

 

 

언제 : 2016. 11. 20.(일)

■ 어디로 : 옥포 옥연지 송해공원

   탐방 경로 : 4주차장 - 구름다리 - 송해정 - 금동굴 가는 산길 - 능선 - 금동굴 - 호수 둘레길로 나와 - 호수 둘레길 한 바퀴 돌아 - 원점 회귀

■ 누구랑 : 아내랑

 

 

흔적


달성군 옥포 옥연지는 이래저래 나랑 인연이 있다면 있고 깊다면 깊은 곳이다.

한때 친구들과 드나들 땐 우린 옥연지란 이름은 몰랐고 '기세못'이라 했다.

기세못은 초등학교 동기가 서울대 농대에서 조교를 하다가 낙향해

처음으로 자리를 잡고 꽃을 심어 자수성가한 곳이기도 하고

잘 아는 누군가는 기세못가에 터를 잡고 오랜 세월 누비고 산 곳이기도 하다.

그곳이 지금 '송해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친구 녀석이 식물학 공부를 마치고 고생 끝에 단신으로 내려와 못가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꽃을 가꾸던 시절

대학 시절 함께 모임을 하던 6학년 4반 반우들과 자주 들락거렸던 곳이다.

*경, *옥, *숙, 정*, 미* 이 친구들과 주로 남자 넷이 함께 다녔다.

친구 녀석이 안겨주는 꽃다발을 한 아름씩 안고 똥폼 잡아가며 사진도 찍고 했었는데

  돌아보니 그때 그시절이 참으로 아름다운 청춘이었던 것 같다.

이젠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한 때나마 내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었음이리라.


친구들과 함께했던 아련한 추억을 상기하며 아내와 난 보국사 옆 3주창에 주차를 하고

송해구름다리가 보이는 둑방 위로 올라갔다.

옆지기한테 꽃밭을 일구던 친구 얘기며, 그 시절 함께 했던 여자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를

마치 전투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전사처럼 의기양양하게 들려줬다.

옆지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의 추억이 서린 곳을 지날 때마다 얘기했다.    

시기나 질투를 하거나 듣기 싫을 만도 한데

옆지기는 내 친구들과의 그런 관계를 알만큼 알고 있는지라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잖게 받아 넘긴다.

하기야 나는 뭐 특별히 숨길만한 사연도 없다.

친구들한테 늘 주문하듯 '남.녀' 관계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지 시켰고,

난 그 약속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위험할 뻔 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 순간을 슬기롭게 잘 모면했었고 그것을 기회로 삼지 않았다.

 자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참 잘 한 일아었다고 본다.


옥포 기세리에 있는 옥연지를 중심으로 달성군에서 지자체 중점사업의 일환으로 수변공원을 조성했다.

규모가 꽤나 큰 편에 속한다.

이미 다녀온 박대감 부부의 얘기를 들어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와보니 생각 이상이었다.

그런데 공원 이름을 왜 하필 '송해'라 했을까?

송해는 이북이 고향인 실향민이 아니던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다만, 옥연지에 와 왜 '송해공원'이라 했는지 설명해 놓은 글을 읽어보니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다.

'송해'는 우리나라 연예계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전설이다.

90세가 된 나이임에도 전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 연세에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으며 한 시대를 풍미하며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는 이도 극히 드물 것이다.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하다랄 수밖에 없다.


'송해'가 달성군의 옥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4세의 나이로 대구 달성공원에서 통신병으로 군생활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석'씨 성을 가진

지금의 아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그 이유랄 수가 있었다.

아마, 혈혈단신으로 남하해 실향민으로서의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터전이

아내가 태어난 이곳이 아니었을까 한다.


옥연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비슬산은 참꽃으로 유명한 대구가 자랑하는 명산이다.

해마다 비슬산 참꽃축제를 개최하는 데 으레이 사회는 원로 방송인인 '송해'가 도맡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달성군에 대한 그의 애착과 아내의 고향에 서린 깊은 연민을 헤아려

달성군에서는 이미 그를 명예 군민으로 추대를 했고

그는 사후에 갈 자리까지 옥포 옥연지가 보이는 산기슭에 장만을 해 놓았다고 한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송해'씨가 아내의 고향인 옥포 지역을 얼마나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사후 묘역까지 봐 두었다니 아예 고향으로 섬길 모양이다.


어찌됐든 송해하면 장수를 하고 있는 성실하고 건강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연예인이니

달성군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그의 유명세를 이용한 이름을 빌어 쓴 것은 달성군 입장으로 보아 나쁠 것은 없다.

처음에는 '왜 송해공원이라 했지'라며 의아해 했지만, 알고보니 명분도 있고 이유도 뚜렸했다.

달성군에서는 그의 이름을 빌어 홍보면에서도 그렇고 한 몫 단단히 한 것이다.

반면에 '송해' 선생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나쁠 이유가 전혀 없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 했지 아니한가.

그는 죽어서도 영원히 남아 있을 대구의 명물이 된 본인 이름의 공원이 조성된 것 또한

개인의 영광이자 가문의 자랑이 된 것이다.

兩全其美라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형태가 되었다.


송해공원엔 온통 그의 캐릭터와 송해란 이름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해구름다리, 송해정, 송해선생 흉상, 송해노래비 그리고 호수 둘레는 송해둘레길이라 칭한다.

송해선생은 더 오래 살겠으며 참 좋으시겠다.


우리는 먼저 송해구름다리로 갔다.

호수와 산을 잇는 높고 짧은 현수교로 송해공원을 가장 멋스럽게 만든 구조물이다.

깍아지른 절개면엔 인공폭포를 만들어 멋스러움이 배가된다.

마침 오색빛깔 무지개가 폭포를 감싸안고 펼쳐졌다.

진기한 장면에 도취되어 연방 셔터를 눌러댄다.


구름다리를 건너 둘레길로 가려다 바로 전망 좋은 곳에 팔각정이 있기에 그리로 갔다.

현판에 '송해정'이라 이름 붙었다.

안내판 설명에 의하면 송해란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본명은 손복희였으나 6.25 당시 홀로 피난오면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바다 '해'자를 써 '송해'란 이름으로 새로운 의지를 보인 이름이다.

그의 이름이 노년에 대구 옥포 옥연지에서 거듭나고 있다.

백세가 무난한 90세 인생까지의 인생을 성실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댓가이리라.


송해정에 서서 우리가 예전에 기세못이라 불렀던 옥연지를 바라보니

그동안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그런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호수를 안고 있는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친구 녀석이 꽃농장을 하던 곳이 어디였고, 초등 동창들이 노닐었던 곳이 어디멘지 한눈에 들어왔다.

짜슥들 지금 여기 와서 이 광경을 보노라면 감회가 나만큼 새로울 것이다.

함께 오지 못하고 혼자 와서 보기 아깝고 미안타.


송해정에서 호수 주변 둘레길로 갈까 능선길로 갈까 잠깐 망설이다 우린 거리낌 없이 능선길로 향했다.

둘레길만 돌아보기엔 아쉽기도 하고 웬지 성이 차지 않는다.

능선길은 사전 정보가 미흡해 길이 어찌 연결될지 알 수 없었으나 길이 아니면 다시 돌아오리라 각오하고

일단 능선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 길은 아직 공사가 완료되지 않은 금동굴 체험현장으로 가는 길이었고

송해정에서 올라가는 길도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었다.

다만, 접근금지라는 안내를 하며 길을 막아 놓았으나 괜찮을 것 같아 개의치 않고 넘어갔다.

우리가 그렇게 서슴없이 줄을 넘어 가니 옆에서 망설이며 지켜보고 있던 어떤 부부도 함께 따라 나섰다.


길은 순하고 좋았다. 조금만 힘들게 올라가면 능선에 다다르고, 길은 순탄하다.

다만, 처음 나오는 갈림길에서 금동굴 방향으로 가야할 지,

표식이 없는 호숫가 방향으로 가야할 지

어디로 가는 것이 맞는 건지 다소 불분명했다.

일단 금동굴로 가는 길이 2주차장으로 가는 길이니 금동굴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길이 얼마나 좋은지 가는 내내 쾌재를 불렀다.

내가 유독 좋아하는 길이고,

능선에 올라 오솔길 같은 낙엽 쌓인 포근한 길을 걷노라면 신선지락(神仙之樂)이 따로 없다

비록 가을의 끝자락이고 소설이 내일모레인지라 야생화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심심찮게 열매로 남아 보여주는 녀석들이 적잖이 있었다.

청미래덩굴의 빨간 열매는 아직 한창 젊음을 과시하는 중이었고

산초나무의 빠알간 가지 끝에 콩알만한 새까만 열매도 늘보 부부의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해 주었다.

마치 까만 보석 같이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탐스럽던지 그놈들과 한참을 노닐었다.

쥐똥나무의 열매도 바글바글 달려있고,

유별나게 광채를 자랑하는 배풍등의 빨간 열매도 아직 푸지기 달려 있다.

오늘은 빨갛고 까만 열매랑 친구하며 어울렸다.


반신반의하며 오다보니 금동굴 갈림길까지 와 버렸다.

쭉 이어지는 길은 녹색길로 가는 방향을 표시하고 좌측으로 새는 길은 금동굴로 가는 길이다.

그 길로 가면 금동굴이 나오고 호수둘레길과 만날 것 같다.

이정목 위에 달린 조그마한 개략도를 보니 더욱 확신이 선다.


금동굴은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굴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뚫기는 다 뚫은 것 같고 내부 공사만 마감되면 될 것 같아 보였다.

뒤쪽으로 돌아나가니 안전모랑 금동굴의 내부 구조를 나타낸 안내판이 있었고

내부 보강재를 댄 모습과 터널의 형태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동굴 밖에서만 대충 구조를 살펴보고 호수둘레길로 갔다.

금동굴에서 호수둘레길은 금방이다. 우리는 능선을 넘어왔기에 금동굴에 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호수둘레길을 따라 금동굴로 가면 길도 쉽고 금방간다.

하지만, 원래 쉽게 가면 감흥도 떨어지는 법

일삼아 능선을 넘어 우리처럼 가는 것도 제법 운동이 되고 꽃도 열매도 볼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걷고 싶다면 우리가 간 길대로 가보는 것이 좋다.


호수둘레길로 들어서니 그제사 둘레길의 진면목을 느낄수 있었다.

호수에 잠긴 나무의 반영과 탁 트인 호수 전경이 너무 좋다.

옥연지를 이렇게 변화시키다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기세못을 가끔씩 들락거린지 벌써 35년 세월이 지났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엄청난 변화에 말문이 절로 막힌다.

그때는 못가에 대부분 매운탕집이었고, 닭백숙집이 아니었던가. 실로 놀라운 변화다.


호수 가운데 백세교란 다리를 이어 백세정이란 정자가 섰다.

운치가 그저 그만이다. 새벽 안개가 자욱할 때 오면 청송의 주산지 부럽지 않은 정경이다.

야경 또한 일품일 것 같다.


백세정에서 징검다리를 건너면 옥연지를 상징할만한 대형 물레방아가 보이고

그 앞에 '용의 알'이라고 부르는 동그란 형태의 화강암으로 된 돌이 놓여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지리교육과 전영권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용의 알'은 핵석(Core stone)이라 하며 약 6,5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땅속 화강암에 발달하는 절리에 의해 떨어져 나간 돌이 오랜 세월 심층 풍화작용으로 인해

주변의 모가 난 입자가 떨어져 둥근 돌 모양의 형태를 갖춘 것이라고 한다.


언젠가 비슬산에 올랐을 때 본 천연기념물 435호인 암괴류와 같은 형태라 하며

여기 있는 용의 알은 비슬산관광호텔 건설 현장에서 발굴된 것을 일부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심실풀이로 와 본 옥연지에 이래 저래 볼거리가 많다.


옥연지 도로 주변은 한 때 매운탕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오늘 보니 거의 사라지고 없고 산기슭 쪽에 몇 군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체로 가기도 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일부러 찾기도 한 곳이라

약간 회한이 서리긴 했지만, 시원하게 밀어버리고 둘레길을 조성해 놓으니 그도 나쁘지는 않다.


오랜만에 여기까지 온 김에 용연사를 찾았더니

웬걸 매표소에서 주차비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용연사가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어 옥연지 오면 한번 가볼까 싶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돈을 받고 있어 미련 없이 차를 돌려나갔다.

다음에 비슬산 가는 길이 있으면 용연사로 내려와야겠다.



사진으로 보는 옥포 옥연지 송해공원



호수를 완전히 한 바퀴 휘감았다. 

 

본문에 쓴 내용은 이 안내판의 설명을 참고했다.

 

나팔꽃 인생이란 송해의 유일한 노래가 노래비로 섰다.

 

보국사가 있는 여기가 3, 4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여기 주차하고 송해구름다리로 올라갔다.

 

보국사 앞에 있는 축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 

 

송해구름다리로 올라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