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10월 연휴에 2박 3일 인천권 탐방
- 석모도, 강화도, 인천차이나타운, 인천근대문화거리 -
■ 언제 : 2016. 9.30(금) ~ 10. 1.(일)
■ 어디로 : 강화도, 석모도, 인천차이나타운, 인천근대문화거리
■ 누구랑 : 빈나리 부부랑 수화니네 부부랑
2부 강화도편
좀은 아쉬운 마음을 머금고 석모도에서 강화로 이동했다.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가 강화인 만큼 강화는 알뜰살뜰 살펴봐야 할 거 같다.
강화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곳이 마니산 참성대다.
강화에 와서 마니산을 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뭔가 대단한 오류를 범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번 인천 여행의 탐방 일정으로 보아 도저히 마니산을 오를 형편은 안 된다.
크게 아쉬웠지만, 눈물을 머금고 전등사 가는 길에 마니산 앞에 차를 잠지 세웠다가
마니산을 곁눈질한 후 바로 떠나는 것으로 만족을 했다.
강화 탐방의 두 번째 백미는 누가 뭐라해도 전등사를 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탐방 포인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등사를 첫 째로 꼽을 수도 있고 둘 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말로만 듣던 강화도 전등사!
결국 다니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는 영화를 누리게 된다.
아내는 두 번째다. 다니는 절에서 사찰 탐방하는 기회가 있어 먼저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아내한테 들은 말이 있어 먼저 전등사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 기둥 상부에 짜 놓은 귀공포부터 눈여겨 보았다.
귀공포에는 아내의 말대로 혹자는 원숭이상이라 하고 혹자는 벌거벗은 여인이라 치부하는 ‘나부상(裸婦像)이 있었다.
이 나부상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데
다들, 전등사 대웅보전을 짓던 도편수와 도편수를 배신하고 달아난 여인의 사랑 얘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 지정된 귀함도 있지만, 도편수의 무념의 사랑 이야기로
그 유명세를 더하기도 했다.
귀공포에는 나부상이 추녀를 왼손으로 받치고 있기도 하고 오른손으로 받치기도 하며,
양손으로 떠 받치고 있는 모습도 있다.
부처를 믿고 죄를 사하며 공덕을 쌓으라는 도편수의 의도가 깔려 있기도 하거니와
다소 익살스럽기도 한 장면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아니하고 배신한 여인의 삶을 되려 공덕을 쌓아 부처로 희구하게 함은
영욕의 삶에 찌든 속인들이 깊게 새겨 봐야 할 덕목으로 회자된다.
전등사는 600년 묵은 은행나무를 비롯한 노거수가 인고의 무게를 함께 이고 있었다.
지금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강화가 그 엣날 얼마나 우환을 겪었는지
되돌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모두 무지의 소산이고 대책없는 정쟁의 회오리만 되풀이한 결과로 봐야겠지.
지금 우리 정치가 한 번쯤 되돌아 봐야 할 대목이다.
지금 우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전등사를 뒤로 하고 우린 초지진으로 갔다.
초지진을 거쳐 덕진진과 광성보 그리고 갑곶돈대를 탐방하고 강화대교를 건너면
다음 코스인 인천차이나타운으로 가는 동선이 맞춤 맞다.
그런데 강화에는 '돈대(墩臺)'라는 이름을 가진 사적지가 많다.
대략 의미는 알겠다만 차제에 확실한 내용을 알고 싶어 백과사전을 뒤졌더니
돈대(墩臺)란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벽돌塼)으로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를 말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또 하나의 의미를 알고 간다.
초지진도 강화팔경에 해당하며 6경에 속한다.
평지 위에 성곽을 쌓아 방어진을 구축한 것으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우리 병사가 전멸한 우울한 장소이기도 하다.
미군측의 함포 공격을 화살을 막는 방패로 막으니 이미 승패는 기울어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성벽과 격전의 현장에서 이미 노거수가 된 수령 400년 된 두 그루의 소나무 중 한 곳에는
포탄의 파편이 튀어 생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얀 페인트로 둥근 점선으로 나타내 당시의 쓰라린 상처를 나타내고 있다.
신미양요 당시 '슐레이'란 미군 대령의 기록에 의하면
근대화된 무기 한 자루 없이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근대화된 무기로 무장한 미군과 대항하여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와 가족을 위해 그토록 강렬하게 싸우다 죽은 국민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한 우리 선조들의 용맹한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섭고 겁이 났을까? 그럼에도 죽음을 불사하고 초개같이 목숨을 헌납한 것이다.
자고로 나라가 강해야 백성이 평화롭고 안전한 법이거늘
이제 이러한 아류는 더 이상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덕진진으로 갔다. 덕진진은 초지진 바로 곁에 있었다.
입장료가 있었다. 700원이든가 비싸지는 않았지만, 가는 곳마다 입장료를 내고 가기는 좀 그랬다.
그래서 덕진진은 밖에서 기념으로 사진만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에 간 곳은 광성보였다. 모두 인천으로 가는 길에 있고 고만고만한 거리에 있었다.
광성보는 조선 1658년(효종 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 수비 진지의 하나로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군과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이었고,
당시 전장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와 350여 명의 순국영령을 기리는 신미순의총과
같은 의미로 또 다른 순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쌍충비가 있었다.
강화에 와서 역사의 쓰라린 아픔만 보는 것 같아 괜히 속만 상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순국선열 앞에 서니
망연자실한 채 그저 숙연해지기만 한다.
뭔 놈의 역사가 이리도 아픔을 많이 가졌는지 괜시리 짜증이 날라칸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우리 일행은 광성보를 나름대로 넉넉하게 걸었다.
해안선에 비친 낙상홍의 빠알간 열매가
나라를 위해 헌신짝처럼 목숨을 던진 우리 선조들의 붉은 핏덩이 같아 보인다.
가만히 고개 숙이고 이제 강화에서 마지막 탐방지가 될 갑곶돈대로 향한다.
강화에서의 마지막 여정이 될 갑곶돈대에 도착했다.
인천으로 가는 도로 사정이 어떨지 염려되어 강화에서도 많은 곳을 다닐 수 있는 여간이 아니되었다.
그래서 갑곶돈대가 마지막 코스라 여겨져 아쉬움이 배가되어 알뜰하게 살폈다.
갑곶돈대는 외부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이런 치욕적인 수모와 아픔을 안고 있다.
강화전쟁박물관이 있기에 안으로 들어가 건성으로 한 바퀴 돈 후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성곽을 따라 걸어가노라니
황금빛을 머금은 토실토실한 탱자를 달고있는 탱자나무 한 그루가 번쩍 눈에 띈다.
한 눈에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탱자나무다.
역시 안내한 내용을 보니 천연기념물 제78호인 나무다.
전에 살던 집 가까운 곳, 칠곡 국우동에 수령 400년 된 탱자나무가 있다.
시기를 맞추지 못해 꽃 핀 모습과 열매 달린 모습을 제대로 보질 못했는 데
여기서 이런 아름드리 탱자나무에 누런 탱자가 탱글탱글 열린 것을 보다니
이 순간 마치 새가 되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지금까지 전시에 전사한 순국선열의 핏빛만 봤다면
갑곶돈대에서 나라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던진 선조들의 영령이
환하게 웃는 부처상으로 다가온다.
죽어서라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묻힌 김에 천연기념물 제79호인 사기리 탱자나무도 보고 올 걸 그랬다.
우리가 건너야 할 강화대교가 바로 앞에 있고
젊은 청춘남녀는 행복한 모습으로 한 낮의 데이트를 즐긴다.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는 만과 곶의 차이와 돈대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을 한다.
성곽너머 해안가에는 비둘기와 백로가 짝을 지어 한가로이 노닐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도 별반 다를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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