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강원 태백, 서리꽃 만발한 겨울산 트레킹
한국교직원신문 2013-12-16
상고대가 활짝 핀 태백산 정상 부근 고사목들이 아침 햇살에 연분홍색으로 곱게 물들고 있다. 상고대와 아침햇살이 만나 어떤 물감으로도 흉내 못 낼 대자연의 색채를 창조하는 순간이다. 고사목 뒤에 보이는 산들은 운해를 뚫고 불쑥 솟은 백두대간 봉우리들.
뽀드득 뽀드득 … 雪來는 백두대간 속으로
‘설악산은 가산(佳山), 오대산은 명산(名山), 태백산은 영산(靈山)’이라는 말이 있다. 설악산보다 높지 않고 오대산보다 화려하지 않은 태백산에 왜 영산이라는 극존칭 수식어가 붙었을까.
요즘도 석탄을 생산하고 있는 강원도 태백은 산의 중심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태백산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산의 중심인 태백은 물의 중심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삼수령에서 흘러내린 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그리고 동쪽으로 흐르면 오십천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산과 물의 중심으로 한겨울 설경이 아름다운 태백의 백두대간 중 최북단에 위치한 산은 천의봉으로도 불리는 매봉산(1303m). 삼수령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3.8㎞ 오르면 눈 덮인 매봉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매봉산 정상은 바람이 드세 ‘바람의 언덕’으로 명명됐다. 부드러운 능선을 수놓은 풍력발전기가 바람개비처럼 원운동을 하고, 설원으로 변한 산비탈은 바람의 무늬가 물결 모양으로 새겨져 더욱 신비롭다.
탐스런 눈꽃 장관인 트레킹코스
매봉산은 고랭지 배추밭으로도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화전민들을 이주시켜 개간한 배추밭의 규모는 110만㎡. 농로는 트럭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데다 가팔라 ‘배추고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배추 수확을 앞둔 9월에는 등고선을 그리는 초록색 밭이랑이 이국적인 풍경화를 그린다. 매봉산과 백두대간 능선으로 연결된 금대봉(1418m)은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피고 지는 천상의 화원. 한겨울에는 야생화보다 더 탐스런 눈꽃과 상고대가 피어 눈꽃 트레킹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트레킹 출발점은 정선군과 태백시의 경계인 두문동재(1268m). 싸리재로도 불리는 두문동재는 금대봉을 관통하는 두문동재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38번 국도가 달리던 백두대간 고개로 인근의 만항재(1330m)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동차도로다.
불바래기 능선으로도 불리는 금대봉 가는 길은 평지나 다름없다. 두문동재에서 금대봉까지 1.2㎞로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없어 눈이 쌓여도 크게 힘들지 않다. 금대봉 가는 길은 눈이 녹는 5월에는 얼레지, 제비꽃, 양지꽃, 미나리아재비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피는 천상의 화원으로 이름났다.
옛날에 금이 많았다는 금대봉은 은대봉과 함께 환경부가 지정한 자연 생태계 보존지역. 금대봉 기슭에는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용연동굴이 있다. 금대봉에서 검룡소와 함께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고목나무샘을 거쳐 분주령까지는 3.6㎞. 두문동재에서 은대봉까지는 1.1㎞로 눈꽃을 활짝 피운 나목 터널이 출발점. 터널을 빠져나오면 제주도의 오름을 닮은 은대봉의 설경에 눈이 부신다. 비록 산행 코스가 짧지만 능선에 서면 금대봉과 매봉산을 잇는 유려한 곡선의 백두대간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헬기장으로 이용되는 은대봉 정상은 나목에 둘러싸여 의외로 아늑하다. 함백산과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물론 태백, 정선, 영월, 삼척의 고산준령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모습이 장쾌하다. 은대봉을 관통하는 태백선 정암터널(4505m)은 죽령터널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태백의 추천역도 은대봉 기슭에 위치한 정거장이다.
별빛 쏟아지는 어둑새벽 등반
두문동재에서 은대봉을 거쳐 주목나무 군락지인 함백산(1573m) 정상에 오르는 구간은 눈꽃을 피운 잡목 숲이다. 그러나 정상이 가까워지면 눈을 흠뻑 뒤집어쓴 주목나무 군락이 펼쳐진다. 만항재(1330m)에서 함백산 정상까지 2.7㎞를 자동차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한겨울에는 제설이 안 될 때가 많으므로 걷는 게 안전하다. 정상에 서면 백두대간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멀리 동해바다 해돋이도 한눈에 들어온다.
태백의 백두대간 봉우리 중 으뜸은 태백산이다. 태백산 산행의 참맛은 정상에서 맞는 황홀한 해돋이와 고사목으로 변한 주목에 핀 상고대와 눈꽃을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 운해가 흘러 백두대간 봉우리들이 다도해 섬처럼 펼쳐진다면 금상첨화.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석사조의 풍경을 만나려면 어둑새벽에 유일사 코스로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 산은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길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축 늘어진 회나무와 언건한 떡갈나무가 마치 귀신처럼 서 있다. 바람과 불에 꺼꾸러져 있는 나무가 언덕에 옆으로 누워 길을 끊었으나 눈이 쌓여서 형체가 흐릿하다. 서 있는 나무들은 바야흐로 억센 바람과 싸우느라 그 소리가 허공에 가득하다. 동쪽에서 진동을 하면 휘이휘이 서쪽에서 메아리를 친다.”
조선 영조 때의 선비화가 이인상(1710~1760)이 묘사한 태백산의 겨울풍경이다. 그는 1735년 겨울에 태백산을 사흘 동안 유람하고 유태백산기(游太白山記)라는 수필집을 남겼다. 송하관폭도와 설송도를 그린 화가이자 선비인 이인상의 글은 서정적이고 사실적이라 눈앞에서 태백산을 보는 듯하다.
여느 태백산 산행로와 마찬가지로 유일사 코스도 대체로 평탄하지만 들머리는 제법 가파르다. 발목 깊이로 쌓인 눈을 헤치고 나가면 하늘을 가린 낙엽송 가지 사이로 별빛이 쏟아진다. 별빛이 눈길에 반사되어 숲 속으로 흩어지고,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별빛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유일사 쉼터 이후로는 이인상의 표현처럼 등산로는 오솔길로 바뀌고 쌓인 눈은 무릎 높이로 깊어진다. 키가 점점 작아지는 참나무 군락지 끝에서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生千年 死千年)’을 산다는 주목이 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다.
태백산에 자생하는 주목은 약 4000그루로 중턱부터 장군봉(1567m) 아래까지 드문드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령 900년이 넘는 거대한 주목은 태백산을 지키는 터줏대감. 고려 초기에 뿌리를 내렸을 최고령 주목은 ‘살아서 천 년’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성한 잎에 화려한 눈꽃이 피어 있다.
‘죽어서 천 년’을 살고 있는 주목 고사목은 약 20여 그루로 장군봉 주변에 흩어져 있다. 가슴 높이의 철쭉 군락 사이에 뿌리를 내려 더욱 돋보이는 최고령 고사목의 나이는 산 날과 죽은 날을 합해 약 1000년. 숱한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증인이지만 굵은 줄기에 기하학적 형태의 가지만 남은 모습은 ‘어린왕자’의 바오밥 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백두대간 봉우리 속 황홀한 해돋이
암청색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온다. 매서운 칼바람이 능선을 할퀼 때마다 주목 가지에 핀 눈꽃이 부서져 하얀 은가루를 날린다. 멀리 동쪽 하늘이 드디어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수평선을 뒤덮은 구름 위로 오렌지색 기운이 점점 강해지더니 주목 가지 사이로 눈부신 빛 덩어리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순간 장군봉 주목 군락지에 찬란한 아침햇살이 스며든다.
햇살에 젖은 고사목 가지가 연분홍으로 물들고 햇살을 등진 가지는 남태평양의 산호처럼 하얗게 빛난다. 태양이 시시각각 고도를 높이자 칼바람에 연신 비명을 지르던 철쭉나무도 새색시 얼굴처럼 연분홍색을 띤다. 상고대와 아침햇살이 만나 어떤 물감으로도 흉내 못 낼 대자연의 색채를 창조하는 순간이다.
주목 가지 끝에 해가 걸리면 태백산 정상에서는 또 다른 장관이 연출된다. 북쪽으로 화방재를 건너 함백산, 은대봉, 금대봉,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봉우리들이 운해 위에 우뚝 솟아 다도해의 섬을 연출한다. 남동쪽으로는 구룡산(1345m), 면산(1245m), 백병산(1259m,) 응봉산(998m)이 중중첩첩 열두 폭 산수화를 그린다. 사방을 둘러봐도 운해를 뚫고 불쑥 솟은 백두대간 봉우리들뿐이다. 이인상은 이 광경에 취해 이렇게 읊었다.
“ 사방 백리에 산이 모두 흰 눈빛이어서 마치 뭇 용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듯도 하고, 마치 일만 필의 말이 내달려 돌진하는 듯도 하다. 안개 속에 불쑥 드러났다가 사라져 없어지고, 어두컴컴하다가 활짝 열리기도 하면서, 번쩍번쩍 반짝반짝, 희디희고 맑디맑게, 빛의 기운이 허공에 가득하다”
이인상과 동시대 인물인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구름 가듯 물 흐르듯 하며 하늘에 닿아 북쪽이 막혔고, 때때로 자색 구름과 흰 구름이 그 위에 떠 있기도 한다”고 태백산의 운해를 극찬했다. 겨울 아침 태백산 정상에서만 만나는 감동의 풍경들이다.
박강섭 국민일보 관광전문기자
여 행 수 첩
◆ 가는길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에서 38번 국도로 갈아타고 영월과 정선을 지나 두문동재 터널을 빠져나오면 태백이다. 태백산 등산로는 유일사 코스로 올라 당골 코스로 하산하는 게 일반적이다. 왕복 4시간 소요. 겨울산행을 안전하게 하려면 헤드랜턴, 아이젠, 스틱 등을 준비해야 한다. 장갑은 보온이 잘되는 내피장갑과 고어텍스 외피장갑을 함께 준비한다. 핫팩을 휴대하는 것도 요령.
◆ 볼거리
탄광도시였던 태백에는 지질과 탄광을 소재로 한 볼거리가 많아 자녀와 함께 찾기에도 좋다. 구문소 인근의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은 삼엽충 등 고생대의 화석을 전시한 곳이다. 석탄과 광산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보는 태백석탄박물관, 폐광의 실제 갱도 등을 둘러보는 태백체험공원도 놓치기 아깝다.
◆ 먹거리
태백의 별미는 한우고기. 태백산 한우는 해발 650m 이상의 청정 고지대에서 자란데다 재래식으로 도축해 육질이 신선하다. 황지동의 배달실비식당(033-552-3371)을 비롯해 한우고기 전문점이 70여 곳 성업 중이다. 태백산도립공원 입구의 무쇠보리(033-553-2941)는 곤드레나물밥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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