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방

[스크랩] 2004. 9. 이탈리아

728x90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시내에 있으며, 내륙국이자 독립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0.44㎢의 면적에 약 900명 정도의 인구를 지녔으며 면적과 인구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돌기둥에 기대어 있는 여인은 바티칸에 있고 나는 로마에 있다.

 

스칼라극장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이다. 객석도 3,200여석이나 된다. 1946년 4월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개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수미씨도 스칼라에서 몇번 공연하였다고 하니 과히 조수미씨의 실력과 명성이 잘 나타나는 듯 하다.  지금은 극장 외벽을 청소하느라 비계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극장 외벽 청소하는데 소요되는 기간이 몇년은 걸린다고 하니 극장에 쏟는 애정이 대단함을 엿볼 수 있다. 극장 안 좌석은 오페라 매니아 같은 경우에 거액을 투자해 좌석을 아예 개인 혹은 가족 전용으로 매입한다고 하니 정말 놀랍기 그지 없다. 

 

단테의 생가는 두오모 성당에서 시뇨리아 광장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길에 단테의 초라한 생가가 있다. 현재 이곳이 단테의 생가였다는 증거는 벽에 붙어있는 단테의 토르소가 전부이다. 그가 이탈리아에 남긴 유산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현재는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단테하면 <신곡>과 신곡의 모체가 된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을 빼 놓을 수 없다.

단테는 이탈리아의 국보적인 서정시인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평생 짝사랑만 했던 여인 베아트리체와 함께 <지옥-연옥-천국>으로 여행을 하면서 그 곳에서 수백 명의 신화상 혹은 역사상의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죄와 벌, 기다림과 구원에 관해 철학적, 윤리적 고찰을 할 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의 신학과 천문학적 세계관을 광범위하게 전하고 있다.

《신곡》은 중세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문학의 꽃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사후에 대한 중세적인 세계관을 보여준 최정점에 있는 서사시이다. 관리가 허술하여 마치 골목길 안쪽에 있는 평범한 서민 주택 중의 하나인듯 하다.

 

화산 폭발로 잊혀진 폼페이(뒤에 보이는 산이 베수비오 화산)

서기 79년 8월 번영하던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전체와 2,000여명의 주민이 함께 화산재에 파묻히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비운의 도시로 1,500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있었다.

 

폼페이(도로) 여기는 마차가 다니는 전용도로 이 시대에 도로와 인도가 분리되었다니 폼페이 문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폼페이(돌기둥 3개)의 의미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의 끝 부분은 돌기둥 3개가 길을 차단하고 있다. 여자, 노예, 짐승은 넘어올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폼페이 기둥의 모양도 단순하지 않고 연화 꽃 문양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당시 건축 문화 예술성을 짐작해 볼만하다.

 

폼페이 도로 바닥에 새겨진 화살표 모양의 표식은 방향을 나타내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으며 남성의 심볼을 형상 하고 있다. 굳이 성기 모양으로 표시한 이유는 성기 모양이 가르키는 방향이 사창가로 향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이는 당시 폼페이 시민들이 문맹인구가 많았음을 뜻한다.

 

폼페이 귀족들의 화려한 목욕탕 하루 아침에 멸망하지 않는다는 로마가 멸망한 이유는 사치, 향락, 퇴폐라 하더니만 언뜻 그생각이 먼저 드네요. 총무하느라 고생한 듬직한 후배가 당시의 귀족들을 엄하게 꾸짖고 있네요.

 

폼페이 요즈음 사우나탕 같은 곳이겠죠.

 

폼페이 캄파니아 지방에 있는 고대도시.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고대 도시가 서서히 역사 이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중해 폼페이에서 기차를 타고 쏘렌토로 가서 카프리로 출발하는 배를 탐. 에메랄드 빛깔과 햇빛이 절묘하게 어울려 환상의 극치를 자아내는 지중해

 

쏘렌토 뒤로 보이는 해안 마을이 '돌아오라 쏘렌토로'로 유명한 쏘렌토 지방이다. 우리는 일정이 여의치 못하여 카프리를 가기 위하여 폼페이에서 쏘렌토를 거쳐 나폴리로 향했다. 아쉬웠다. 쏘렌토를 지나가면서 못보고 그냥 가다니...

 

쏘렌토 아쉬운 마음에 멀어져 가는 쏘렌토를 향하여 최대한 줌을 당겨본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한마을에 서로 가슴 깊이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있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인은 로마로 시내로 나가고 싶어하나 남자는 따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랑하는 여인은 남자를 홀로 남겨둔 채 떠나버리고 그리움과 아쉬움에 젖은 남자는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만다. 그런그런 이유로 이런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노래의 주제가 되었고 오늘날 가장 널리 애창되는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카프리섬 선착장인 마리나 그란데 카프리로 가는 마이크로버스를 타기 위해 잠시 휴식 중

 

카프리섬 승객을 가득 실고 좁은 산길 도로를 무섭게 질주하는 버스가 승객들 애간장을 다 녹이더만. 얼마나 무섭던지... 운전자를 교육 좀 시키고 싶더만 지중해 건너 멀리까지 간 만큼 피곤해서 고만 참았다.

 

카프리섬 카프리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곳에 가이드의 권유로 찍어 봤는데 별로... 아래 보이는 집들은 대부분이 별장. 부호들은 카프리에 별장을 마련하여 휴가를 즐기러 오고 한다.

 

나폴리의 아름다운 섬 카프리  레몬의 꽃 향기와 남국의 정취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이 섬은 고급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나폴리만에 떠있는 아름다운 카프리섬은 고대 로마시대에서 아우구스투스제등 역대의 황제가 별장지로 삼을 정도로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져있다.

 

카프리 섬 리프트를 타고 카프리의 몬테솔라로산 정상을 향합니다. 처음타고 올라갈 때는 겁이나 조심스럽고 안전하게 선생님이 시키는 학생 마냥 범생의 모범적인 자세로 타고 올라갔다. 내려 올 때는 앞사람 , 뒷사람 사진을 찍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선생님 말 안 듣는 학생 처럼 기만해졌다. 덕분에 앞서 가는 멋진 산사나이를 뒤로 돌아 보게하여 여유있게 직찍... 

 

카프리 섬의 나폴리 항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 나폴리 주에 속하는 섬. 항구에 정박해 있는 전세계를 유람하는 꽤 규모가 큰 크루즈. 지금은 햇볓이 짱짱한 오후 무렵이라 나폴리 항의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가이드는 해질 무렵에 높은 언덕에 서서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가 환상이라고 한다. 보지는 못하고 그렇겠구나하고 짐작을 해 본다.

 

카타콤 catacombe라고도 함.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한 벽장이 붙은 좁은 통로나 회랑으로 이루어진 지하묘지. 카타콤에는 교묘한 구조로 되어 있고 비밀통로가 있어서 모래밭이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박해와 소요 사태가 닥쳤을 때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이지하 공동묘지의 길이는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고 편도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번 더 가는 길이를 합친것과 같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다. 

 

콜롯세움 로마의 상징이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네로의 궁전의 뜰에 있었던 인공연못에 AD 7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성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다. 생사를 겨누는 검투사와 짐승과의 격투기등이 여기에서 개최되었고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만 5000명이 넘는 관객이 입장할 수 있는 경기장이다. 입장료는 우리돈 만원 상당. 콜롯세움 외벽에 뻥뻥 뚫린 구멍은 로마 패망 후의 아픈 상흔을 나타낸다. 굶주린 시민들이 접착제로 사용한 수은을 빼간 흔적이라고 함.

 

콜롯세움에 세워진 개선문  나폴레옹이 병사들을 이끌고 콜롯세움에 당도하여 콜롯세움에 있는 개선문을 보고 프랑스 파리에 더욱 규모가 큰 개선문을 건립하여 개선하는 병사들을 환영하였다고 함.

 

콜롯세움의 소나무 가로수 나폴레옹이 병사들을 이끌고 콜롯세움에 다다렀을 때 병사들은 많이 지쳐있었다. 쉴만한 그늘이 없음을 보고 나폴레옹이 던진 말에 심어진 것이 이 소나무 가로수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그러기에는 소나무가 그리 오랜 세월을 묵은것 같지 않은데... 어디가나 잡상인이 즐비한데 가격이 싼 놈은 재미삼아 사면 몰라도 혹해서 사면 실수연발 함을 잊지 마시라. 잡상인은 주로 흑인이 많은데 '빨리빨리', '싸다싸다' 정도의 한국말은 쉽게하며 잡상인한테 모여있는 사람은 한국사람 밖에 못봤다. 순진한건지 어리석은건지. 유럽에도 잡상인의 표적은 아마 대부분 한국인이리라. 

 

 진실의 입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에 한켠에 자리잡고 서있는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성당의 입구 한쪽 벽면에 원형석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의 입이다. 이 원형 석판은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그레고리팩과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코믹 로맨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와서 더욱 유명해졌다.

한쪽 벽에는 한국인의 낙서가 너무 많아 민망할 지경이라고 한다. 신교장쌤과 함께...

 

어디러라.  베네치아 광장 같은데...  이태리에서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100년 전쯤에 건축된 흰색 건물 같은데

이제 생각도 잘 안나네. 가족들과 함께 관광 온 말레이지아 소녀들과 함께. 내가 더 시커먼게 마치 로마에서 두 딸을 얻은것 같네.

 

트레비 분수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 폴리 대공(大公)의 궁전 정면에 있는 분수.

트레비 분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가 서 있는 모습이다. 트레비('삼거리')란 이름은 분수의 앞에 있는 광장이 3갈래 길이 모이는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제대로 앉아서 사진 한장 촬영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트레비 분수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인하여 모두 비를 피해 한산할 때 잽싸게 나가서 동전 1개를 던졌다. 등뒤로 동전을 한번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을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이드의 우스개 소리로 4번 던지면 가산탕진한다는 말을 덧붙이더군요. 관광객들이 던진 동전은 정기적으로 수거하여 자선사업에 쓰인다고 하며 언제인가 부터는 동전을 몰래가져는 사람들 때문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고 하죠. 

 

에스테 별장의 오르간 분수. 호텔 check out하고 짐을 모두 버스에 싣고 북쪽으로 달려  Villa D'este 도착. 교황 2번 떨어지고 홧김에 만든 별장이란다. 450년 전 그림과 갖가지 모양의 분수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오르간 분수는 파이프의 수압을 조절하여 연주를 하는데 당시 이태리의 과학 기술을 상상해 봄직하다. 

 

에스테 별장 바닥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훌러덩 뒤로 나자빠졌지만 다행히 카메라는 위로 치켜들어 상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다쳤더라면 이후 일정은 모두 눈카메라를 사용해야 하는데 뇌리속에 잔상이 남아 있을란지...

 

바티칸 시국 면적과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교황은 직무상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자 바티칸 시국의 정부 수뇌자로, 이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있었던 그의 직분인 로마 주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성좌라는 표현은 바티칸 시국이 아닌 교황의 영적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로 로마 교황청에서 사용한다. 바티칸 시국과 관련한 교황의 공식 직함은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유리 모자이크로 완성하였다고 한것 같았는데... 그 섬세함과 열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만큼 정교했는데...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꺽이는 듯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4년 만에 완성하였다. 천정화를 완성하기까지 많은 일화가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을 요약하여 간추려 보면 교황이 몸소 총리대신을 대동하고 피렌체를 방문하여 천정화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청을 거절하지 못한 그는 한가지 약속을 받아낸 뒤 상경하여 그림을 그리기로 약속을 한다. 하지만 교황의 자격으로 추상같은 명령을 내리면 될 것을 미켈란젤로에게 아쉽게 청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총리는 그를 매사에 탐탁찮게 여긴다. 작업에 진전이 없자 총리는 교황을 충동질하여 몇차례 작업광경을 보러가려 했으나 교황은 약속한 바가 있어 참고 기다린다. 그러나 계속되는총리의 의심에 혹하여 그를 만나러 갔으나 총리의 의심대로 그는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실은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작업 구상을 하는데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음에 예술에 무감각한 총리는 좋은 구실이 생겨났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교황에게 실망한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교황을 저버린 채 고향 피렌체로 내려가 버렸다. 교황은 그가 꽤씸하였지만 이 작품을 완성해 줄 사람은 그가 적격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라 화를 접고 다시 그의 고향으로 내려가 두번다시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하며 그를 불러 들인다. 그 후 미켈란젤로는 뼈를 깍는 고통을 감내하며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결국 완성하고야 만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작을 만들어 낸다. 이상은 가이드의 설명을 생각나는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 후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총리의 간사한 마음을 응징하기 위하여 오른쪽 끄트머리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총리를 표현한 내용은 또 다른 의미심장함을 회자하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완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예배당의 벽에 그린 프레스코이다. 천장화와 달리 〈최후의 심판〉은 매우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분노에 찬 그리스도 앞에서 죄를 빌고 있는 인물들의 고통스럽고 공포에 떠는 모습은 작가 자신이 최후의 날을 예감한 듯하다. 그리스도의 아래쪽에 그려진 수염을 가진 노인은 순교자 바르톨로메오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얼굴가죽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밤에 열두 제자와 마지막으로 나눈 저녁 식사. 교회 성찬식은 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유다의 배신을 지적하였다.  예수 맞은편에 있는 보름달 같은 둥근 성채가 없는 사람이 예수를 배반한 유다이며 이는 이미 예견되어 있는 일이었으며 베드로는 닭이2번 울기전에 3번 예수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물론 베드로는 이를 강하게 부인하였다.

 

바티칸시국 스위스 근위병  과거 교황들이 교회군의 일부로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긴 했지만, 교황의 개인 경호원으로서의 스위스 근위대는 1506년 1월 22일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창단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교황청 연감 목록에는 스위스 근위대가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성좌’에 종속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2005년 말엽, 근위병의 숫자는 134명이 되었다고 한다. 스위스 용병은 바티칸에서 무료 봉사하며 아울러 이곳에서 근무할 수 있음을 지상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바티칸 시국 바티칸은 나라 자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의 보고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시스티나 경당 등에는 산드로 보티첼리,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하는 르네상스 예술 사상의 거장들이 마음껏 솜씨를 발휘한 작품들로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다. 또 바티칸 박물관과 바티칸 문서 자료관에는 역사상 귀중한 콜렉션을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다. 바티칸은 1984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아래 바티칸시국의 평면도를 보면 건물의 형태가 열쇠 모양으로 설계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뜻하는 이유는 모두 감지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출처 : 슬로우로드
글쓴이 : 박선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