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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방

강남 봉은사/여주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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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내미 일하는 모습도 보고

삼복더위에 처가 식구들이랑 함께 나들이도 하고



■ 언제 : 2017. 8. 1. ~ 8. 3.

■ 어디로 : 강남 봉은사/여주 신륵사

■ 누구랑 : 아들내미랑 처가 식구들이랑




흔적

 

아들내미 사업장이 보고파 서울 가는 길

 

아들내미 서울살이가 어떤지 궁금해 서울로 갔다.

엄청나게 비가 온 뒤끝이라 날씨는 숭숭했지만, 어쩌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일기예보로는 중부 지방에 한 차례 폭우가 더 쏟아진다고 했다.

서울을 가자면 중부지방을 거쳐 가는 길이라 우려되지 않는 바 아니나

그렇다고 오늘 가지 않으면 날짜가 맞지 않아 또 언제 가볼 지 모른다.

 

왜관밖에 가지 못 했는데 우려했던 폭우는 빨리도 쏟아진다.

이런, 이거 안 되겠구나 싶어 샛길로 빠지다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 비는 이 지역에 한 하는 국지성 호우 같아

여기만 벗어나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 싶어 일단 구미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구미 역시 비가 쏟아지면 돌아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어설픈 예측이었지만, 다행히 왜관을 벗어나 구미에 이르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날씨가 말짱했다.

편한 마음으로 가던 길 그대로 달려갈 수 있었다.

 

서울은 아들내미가 차를 가져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짜슥, 아비가 운전 경력이 얼만데 그리 걱정을 하나 싶다가

아무래도 여주에 있는 처남 아파트에 차를 세워 놓고

서울은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처남도 그렇게 주문을 하고, 우리도 그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니 아들내미 역시 한 시름 놓는다.

 

여주에 있는 처남이 서울 올라가는 길을 소상하게 일러주었다.

부발역에서 경강선(京江線)을 타고 판교에서 내려 강남역으로 가는 것이

자차로 운행하는 것보다 훨씬 낫단다.

경강선(京江線)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금시초문이다.

 

후기를 정리하며 경강선에 대해 위키백과에 게재된 내용을 살펴보니

경강선(京江線)은 경기도 시흥시 월곶역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강릉시 강릉역을 이을 예정인 한국철도공사의 간선철도 노선이었다.

또한, 경기도 성남시 판교역에서 여주시 여주역을 잇는

수도권 전철의 운행 계통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명칭은 경기도의 경과 강원도 또는 강릉시의 강의 한 글자씩 따서

경강선(京江線)으로 명명되었다.

현재는 수도권 전철 구간인 판교역 ~ 여주역 구간만 개통되었고,

201712월에 간선철도 구간인 서원주역 ~ 강릉역 구간이 개통될 예정이라고 한다.

위 내용은 Daum 위키백과에 소개된 내용 옮김

 

부발역에서 판교까지 8번째 역에서 내리면 된다.

여덟번 째 역에서 내리지만 한 구간이 길어 소요되는 시간은 그래도 40분이나 걸렸다.

강남을 가자면 판교역에서 신분당선 방향으로 갈아타야 한다.

판교에서 강남역까지는 4코스밖에 되지 않으며,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여주에서 도합 1시간 정도면 넉넉하게 강남까지 갈 수 있다.

그러니 여주까지만 가면 자차로 운행하는 것보다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처남은 서울 갈 일 있으면 차를 가지고 가는 법이 없단다.

한 번 가보니 그 말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전철을 타도 좋은 것이 부발역은 출발점 부근이고

판교는 종착지라 처음부터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로 출발점이라 앉아 갈 수 있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처남 덕분에 서울을 편히 오기는 했다만, 막상 서울에 당도하니

서울살이가 힘들겠다는 느낌이 보이는 그대로 여과 없이 전해진다.

강남에서 살자면 세도 비싸고, 주거 환경 역시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자면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으로

고군분투해야 적자생존이 가능하리라.

좋은 조건 모두 팽개치고 불모지로 뛰어들 때

아비된 마음으로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서더니만,

직접 가서 보고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두 녀석이 좋은 직장 모두 내팽개치고 의기투합하고 나섰을 땐

저 녀석들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싶어 걱정이 태산 같더니만,

몇 년 동안의 직장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젊음과 투지로 똘똘 뭉쳐 결국 황무지를 개간하여 뿌리를 내려놓았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아들들이다.

 

강남 삼성동 봉은사 탐방

 

아들내미가 인근에 봉은사란 좋은 절이 있다며,

엄마가 가면 좋아할 것이라며 그리 갈까라고 묻는다.

강남구 삼성동에 봉은사란 천년고찰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어 어디 멀리 나들이는 못 가더라도 어디로 모시는 것이 좋을까

마음에 쓰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바쁜 와중에 그 마음 씀이 가상타.

 

봉은사는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다르게 말하면 가장 번잡한 도시의 빌딩 숲 속에 있었다.

절치고는 어울리는 장소가 아닌 듯 했지만, 그래도 이 절은 꽤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봉은사에는 보물이 2점이나 있으며,

하나는 보물 제321호인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웅전에 있는

봉은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인 보물 제1819호가 모셔져 있다.

그 중 청동 은입사 향완은 봉은사를 떠나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봉은사 연혁을 살펴보니 봉은사는 신라시대 견성사란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로

혜공왕대에 시작하여 원성왕대에 완성한 성전사원으로

당대의 고승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신라에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른 것이다.

명실상부 고금(古今)을 통해 알려진 일곱 개의 성전사원 중 한 곳이었다.

 

오랜 역사만큼 하나하나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랴 만은

이곳에 와 내 눈에 먼저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범종각 앞에 있는 라일락이라 이름 적힌 나무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여겼다가 라일락이라 이름 적힌 이름표를 보고서야 깜짝 놀란다.

 

꽈배기 틀 듯 꼬인 줄기가 얼마나 긴 세월을 먹었으면

저렇게 굵게 뒤틀렸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가 크고 덩치도 굵은 것이 족히 300~400년은 묵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수령을 조사해보니 근거 있는 확실한 내용은 없고

블로그나 카페에서 언급한 내용으로는 200년도 있고 300년도 있고 400년도 있다.

확실한 수령은 자신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라일락이라 이름 적힌 나무가 수백 년 묵은 것은 분명하니

그렇다면 라일락이란 이름보다는 우리 꽃인 수수꽃다리라 명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봉은사는 음력 715일 우란분절(백중)을 맞아 백중등을 올려 그런지

하얀 등이 절 냄새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연꽃이 함박 펴 오가는 법우님들 손에 든 휴대폰도 바쁘게 움직인다.

 

아들내미랑 청국장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서울 그것도 강남이라 그런지 한 끼 밥값이 만만찮다.

청국장이 15,000원이나 한다.

주차료는 식당에 무료 주차하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 대기하고 있던

주차 대행만 따로 영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주차를 해 주고 돈은 또 식당을 이용한 손님이 내고 있었다.

참 희한한 경우도 다 있다.

나 같으면 서울살이 하겠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어쨌든 아들내미랑 함께해 그런지 청국장 맛은 좋았다.

 

다시 강남에서 판교로 판교에서 부발로

 

여주까지 아들내미가 태워 준다는 걸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올 때 경험해 보니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승용차보다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괜히 아들내미 바쁜데 고생시킬 필요없고

우리는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백번 편했다.

 

강남에서 거꾸로 판교로 가서 판교에서 부발역으로 간다.

역방향으로 가도 출발점에서 탑승하니 편히 앉아 갈 수 있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어디 감히 앉아 갈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생각을 하니 더더욱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은 것이 골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놈의 휴대폰을 깔짝거리며 가고 있다.

새로 생긴 거리의 문화병이려니 했지만

한편으로 가는 길이 지겹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처남이 부발역에 미리 와 대기를 하고 있단다.

강남역에서 대략 1시간쯤 걸렸다.

집 가까이 있는 장어집으로 갔다.

싱싱한 것이 죽어서도 꿈틀거린다. 과연 장어는 장어로고...

처남과 어울려 장어집에서 소주 4병 먹고

남은 장어를 싸달라고 해 집에 와 소주 1병을 더 먹었다.

우리는 이렇게 맛있게 먹었는데 불행히도 아내는 장어를 못 먹었다.

강요로 인해 겨우 한 점 먹었나 그렇다.

 

, 장어 덕분에 한 잔 거나하게 먹고 자 그런지

잘 먹고 잠도 푹 잤다.

 


























흔적

 

이틀째 아침 여주 신륵사로

 

처남이 여주에 있어 여주는 더러 다녀갔어도 신륵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여주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곳이 신륵사 아니던가?

이번에는 날씨가 제아무리 덥다 해도 꼭 가볼 참이다.

 

처남 차를 이용해 신륵사로 갔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문헌에 의한 정확한 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날씨가 더워도 보통 더운 게 아니다.

한 발짝 뛸 때마다 땀이 줄줄 흐른다.

처남 내외는 괜히 우리 때문에 생고생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daum 백과 내용을 옮김>

 

신륵사란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천년고찰 신륵사는 생각한 것처럼 범상한 사찰이 아니었다.

보물도 많고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여러 점 있다.

신륵사처럼 한 사찰에 보물 8점이 있는 사찰이 많지 않을 터

보물이 많은 만큼 많은 역사와 질곡의 삶도 함께 품고 있으리라.

 

사학이나 역사에 조애가 깊은 사람이 아니고

잠시 들렀다 떠나는 길손에 불과한 사람이라

하나하나 여물게 보고 관찰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주에 왔으니 신륵사를 방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둘러봤을 뿐이다.

 

수령 600년 된 향나무가 노구임에도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마치 신륵사의 건재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꿋꿋하게 자라고 있었다.

향나무가 묵은 세월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긴 세월을 저리도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맙기까지 했다.

나무가 저 정도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륵사를 창건했다는 원효와

용마를 잠재운 전설을 가진 나옹화상과 인당대사의

혼이 서려 자란 것이라 봐야겠다.

 

보물이 워낙 많아 일일이 다 챙겨보지도 못했지만,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9.4m에 달하는 신륵사 다층전탑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신륵사 삼층석탑과 강월헌이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신륵사 동남쪽 경내의

자그마한 동산에 세워진 벽돌로 쌓은 탑이라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앞서 서술한 적이 있다.

 

강을 따라 흐르는 화강암반 위에 신륵사 삼층석탑이 있다.

유유히 흐르는 여강(남한강)을 따라 전망 좋은 곳에 세워진 삼층석탑 자리는

바로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이 입적한 자리이며 삼층석탑은 바로 그 자리에 섰다.

그러니 그 탑은 단순한 탑이 아니며 나옹선사의 전신이라 봐야 한다.

 

아래 내용은<http://www.kyongbuk.co.kr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615>

경북일보에 기고한 글 참고

 

"신륵사 삼층석탑 아래 강월헌이란 정자가 유유히 흐르는 여강을 바라보며 섰다.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다비장소이며 삼층석탑은 나옹화상이 입적한 곳이다.

나옹은 죽으면서 와도 온 곳이 없으니 달그림자가 천강에 비친 것과 같고

가도 가는 곳이 없으니 맑은 하늘의 모습이 찰나에 바뀌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강월헌 편액은 나옹화상의 호를 따 그의 제자들이 정자이름을 지었다.

본래의 누각은 나옹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3층 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3층 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6각형 정자로 다시 지었다.

이색이 시를 썼고 권근 역시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이식 김창협과 정두경외 다산 정약용도 동대에 올라와 시를 썼다."

 

강월헌 아래는 바로 그 옛날 조포나루가 있던 곳이다.

사람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와 뗏목을 이끌던 떼꾼, 소금배가

바로 여주에 있는 이포나루와 여기 조포나루를 이용했던 것이다.

조포나루는 지금 사라졌지만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른다.

죽어서도 죽은 것이 아닌 나옹화상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여강에 흐르는 잔물결을 지켜보고 섰다.

 

강 건너 선착장에 황포돛배가 한 대 섰다.

조선시대 4대강 나루인 조포나루를 마주보며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조포나루 또한 황포돛배가

관광객을 실어 나르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여주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천혜를 업은 도시다.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검룡소에서 흘러온 물길인가 하면,

질 좋은 토양과 그 토양을 바탕으로 윤기 자르르 흐르는 곡물 생산지로 유명하다.

서울에서 가깝고 한 나라의 수도처로도 손색없어 보인다.

이번에 처남댁에 하루 머물며 짧지만 여주를 나름대로 보았다.

여주가 이렇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였음을 새삼 느낀다.

 

여주에서 음성으로

 

날씨가 무지무지하게 덥다.

변명 같지만 너무 더워 신륵사도 여물게 탐방하지 못했다.

신륵사의 여운을 뒤로하고 음성 처형댁으로 달려갔다.

 

벌써 동서인 형님은 아침 일찍 밭일을 끝내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이 염천의 무더위에도 농부는 할 일을 해야만 하는가 보다.

이제 연세도 있고 해 농사일을 줄인다고 해도

농군은 농사에서 손을 떼야 떼는 것이지 농지를 다 처분하고

도회지로 나가지 않은 다음에야 하는 일이 밑도 끝도 없이 남아 있다.

그게 농군의 현실이다.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지만, 타고난 천성은 어찌할 수 없는가 보다.

벌써 나이 70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복받이인 처형과 동서인 형님 내외를 바라보면 항상 기분이 좋고 흐뭇하다.

 

우리가 오면 삼계탕을 해 줄 거라고 닭을 여섯 마리나 사다놓았다.

여섯 명이니 11닭을 해치워야 한다.

인삼 농사를 지으니 인삼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평하게 자기 분량이 있으니 11닭의 자기 몫을 해치우면 된다.

그러니 오히려 먹기가 더 좋았다.

 

음성도 무지하게 더웠다.

어디 여행이라도 좀 나설까 했더니만

이건 뭐, 그야말로 가만히 집에 있는 것이 최선의 보약이다.

밤에는 열대야가 있어 술을 한 잔 했어도 잠조차 잘 오지 않는다.

형님은 땡볕에 일을 하는 버릇이 있어 그런지 잠도 잘 주무신다.

처남도 그렇고 동서인 형님도 그렇고 잠 잘 자는 사람을 보니 부럽다.

난 깼다 일어났다 되풀이하며 결국 잠을 설쳤다.

큰방으로 건너간 아내도 잠을 설치는 것 같다.

요즘 부부가 잠을 설치는 것이 이제 아예 습관이 되었다.

 

셋째 날, 처가로 가 집에 들른 후 어른을 뵈러 갔다.

 

음성에서 두 형님과 작별을 고하고 우린 빈 집으로 남은 처가로 갔다.

요즘은 처남도 잘 가지 않는 것 같아 집이 꽤 산만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빈집 표 하나 없이 늘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역시 처남다운 깔끔함이 돋보였다.

처남이야 맥가이버 저리가라 할 만큼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전기가 전공이면서 집도 짓고 웬만한 집수리는 혼자 힘으로 다한다.

나한테 그런 재주가 십분의 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경도 잘하고 집 꾸미기도 잘 한다.

풍란도 잘 붙이고 수석에도 일가견이 있다.

시골집 곳곳에 돌을 많이 채취해 놓았으며, 빈 집에 화초도 잘 자라고 있었다.

가끔 들러 손을 본다는 얘기다.

 

뒤뜰에 가서 아내는 고추를 따고 난 대파를 캐 다듬었다.

빈 집을 둘러보니 곳곳에 어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살아계실 때 맘 편히 모시지 못한 것이 올 때마다 켕긴다.

대구 박서방 왔다고 하면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 둘 모여

안동소주 한 잔씩 나누시던 그 모습이 아련하다.

그 어르신들은 장인어른보다 더 일찍 가셨다.

 

산소로 갔다.

으레 할아버지 산소부터 찾는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바로 곁이라 찾아뵙기 수월하다.

할아버지 자리는 언제 봐도 명당이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아버님 어머님을 뵈러 갔다.

역시 잔디도 잘 살아 있고 묘도 튼튼하니 잘 있다.

뵐 때마다 느끼지만 세월이 참으로 무심하다.

스물여섯 철없을 때 장가들어 벌써 내 나이 환갑이 다 됐다.

두 분은 세월이 불러서 갔겠지만, 이제 우리가 그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어디 있으랴만

사는 동안 세월을 거슬리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

아버님 어머님 앞에서 나직이 한 마디 올렸다.

집사람 건강하게 잘 보살펴 달라고...

 

담배 한 대 붙여 드리고 담뱃불이 다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서니

묘소 앞 그 옛날 담배 농사를 짓던 처갓집 밭에는

처가 바로 옆집 사는 신실한 농부가 제초제를 치고 있다.

아까 집에서 봤지만, 산소에서 보자며 먼저 밭으로 갔던 것이다.

갑니다.’하고 인사를 하니

. 조심히 가세요.’라며 살가운 인사를 건넨다.

오고 가는 인사에 촌 동네에 내리쬐는 불볕더위가 좀은 가신다.

 

이제 집에 가면 산이고 뭣이고 아무데도 가지 말아야겠다.

너무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