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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산

한라산! 백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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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고의 날!

파란 하늘과 흰구름 담은 백록담

결국 보고야 말았다. 



■ 언제 : 산행일 2019. 7. 26.(금)

           제주 총 체류 기간 : 2019. 7. 25.(목) ~ 7. 30.(화)

           아내랑 7. 25.(목) ~ 7. 30.(화), 나는 7월 29일 부장팀과 합류해 7월 30일까지 머무름


■ 어디로 : 한라산 백록담

             성판악 - 4.1km - 속밭 - 1.7km - 사라오름 입구 - 1.5km - 진달래밭 대피소  - 2.3km - 백록담

             하산하면서 사라오름 들림(사라오름까지 왕복 1.2km)


■ 누구랑 : 아내랑


■ 원통한 일 : 백록담 부근 야생화가 파일 손상으로 인해 다 날아가버렸으나 무료복구파일프로그램을 이용해

    다행히 600여 장의 사진 중 1/4은 건짐.




흔적




725일 17시,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제주에 도착해선 먼저 딸내미랑 조카네 가족과 함께 모여

조카가 자주 애용하는 흑돼지 전문집으로 갔다.

 

이 식당은 제주에 터를 잡은 조카네 덕에 몇 번 간 적 있다.

소문난 흑돼지 전문점이라 고기 맛이 좋고,

조카네 가족과 함께해서 그런지 분위기도 더 좋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조카랑 제주의 대표 향토주인 한라산 소주를 3병이나 마셨다.

둘이서 소주 3병을 비웠더니 아내의 성화가 만만찮다.


그렇게 소주를 마셔대면 내일 한라산은 어찌 갈라카노

“주책없이 마셔대면 내일 한라산 안 따라 간다.”

딱 한 병만 더 마시고 싶은데, 아무래도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다.

아내의 눈치가 시어미의 고추당초보다 더 맵다.

 

새벽 5시에 기상했다.

이번 제주행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라산 등반만은 꼭 하리라 다짐하고 왔다.

첫 번째 목표는 무조건 한라산이다.

워낙 각오가 단단해서 인지 어제 마신 술은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코스는 성판악에서 출발하는 왕복 코스로 정했다.

관음사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두 번이나 왔다 간 아내가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는 길을 원하지 않았다.

 

성판악 코스는 작년 겨울에 잠깐 맛을 보긴 했었다.

하얀 눈밭에 굴거리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선 길을

한라산 냄새나마 맡고 싶어 잠시 한 발 들여 놓았던 것이다.

한라산 초입은 굴거리나무와 조릿대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제 왕복 19km나 되는 지리한 길을 가야 한다.

보통 8시간 정도 잡더라만 아마도 난, 12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아는지라 새벽 5시부터 일찍이 서둘렀다.



[한라산 등반코스 성판악-백록담]
여기서 우린 하산하면서 사라오름을 다녀온다.



산행할 땐 내게 시간 개념이란 말은 의미가 없다.

단지 거리만 의식할 뿐이지 난, 시간에 구애 받는 산행은 하지 않는다.

다만 워낙 는적거리는 타입(type)이다 보니 시간이 부족할지 몰라

산행 시간을 남들보다 2/3 정도는 더 길게 잡는다.

일찍 서둘러 늦게 내려온다.

내가 산행하는 방식이다.

 

한라산은 높고 긴 산행길이다.

가기 전에 먼저 지친다.

이런 긴 구간은 끊어서 가는 것이 좋다.

 

첫 코스는 속밭이다.

백록담은 머리에서 지우고 "속밭'까지 갈 생각만 한다.

첫 번째 목표 지점은 '속밭'이다.

속밭까진 내가 기대하는 별다른 녀석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조릿대가 한라산을 뒤덮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는지라

그저 묵묵하게 걷기만 할 작정이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한라산을 찾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젊은 연인들과 우리 산을 찾는 외국인들을 보면 더 그런 기분이 든다.

폭염에 비지땀을 흘리며 가는 사람

엄동설한에 에스키모인처럼 완전 무장하고 설원을 찾는 이들을 보노라면

괜스레 존경스럽고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내겐 그런 사람들이 모두 성실하고 선하게 보인다.

 

속밭에 오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빈 건물 속 또는 주변 나무 그늘 밑으로 가 쉬고 있다.

우리도 잠시 땀을 식히고자 가던 걸음을 내려놓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땀 한 방울 닦으며 긴 호흡 한 번 내뱉는다.

 

화장실 가는 길에 빛깔 좋은 산수국 한 무더기가 눈에 띈다.

여기까지 왔어도 조릿대와 산수국 외엔 당최 뵈는 게 없다.

이쯤 되니 조릿대 행렬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기세로 봐선 백록담까지 덮을 태세다.

이 녀석 때문에 다른 꽃들이 자랄 틈이 없다.

제주조릿대가 한라산 생태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관련 기관에선 이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스럽다.

 

속밭까지 왔으니 이젠 사라오름 갈림길까지만 생각하고 간다.

속밭에서 2km쯤 가면 된다.

길은 그리 험하지 않다. 슬금슬금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갈참이다.

사라오름으로 가는 길도 숲에 가려 풍경은 없다.

그저 지리할 정도로 조릿대만 보고 걸으면 된다.

 

산길에 꽃도 없고 조망 또한 닫혀 있으면 산행길이 꽤나 고루하다.

하지만 이럴 땐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운동 삼아 등산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절대로 조급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꽃이 있으면 반드시 보여주기 마련이다.

괜히 조급하게 생각해 게 잡아 물에 넣는일거양실(一擧兩失)을 범해서는 안 된다.

 

사라오름 갈림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아예 꽃을 보고자하는 마음을 싹 비웠다.

적어도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가야 야생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련을 버린 만큼 한라산 조릿대에 대한 우려와 실망은 더 크게 다가왔다.

오르면 오를수록 조릿대가 문제인 것만은 확연한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젠 아무 생각 없다.

그래도 두 눈은 습관처럼 주변을 살핀다.

보이지 않는다고 주변을 살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에 띄는 게 없을지라도 내 눈은 시리도록 주변을 살핀다.

진달래밭대피소까지 가는 길도 여전히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랫동네와는 그래도 뭔가 느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변화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뱀톱과 개석송이 많아진다.

이제 막 꽃대 올린 잎이 게를 닮은 게박쥐나물도 보인다.

강원도 산에서 박쥐나물은 더러 봤지만 게박쥐나물은 처음 봤다.

드디어 처음 만나는 녀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달래밭대피소엔 꽃 지고 예쁜 열매 달린 나무들이 늘어섰다.

이 녀석들을 보는 순간 이제 시작이구나란 희망과 열정이 샘솟는다.

 

산개벚지나무에 달린 상큼하고 앙증맞은 빨간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산개벚지나무다.

가시가 위협적인 섬매발톱나무 열매도 자그마한 대추처럼 조롱조롱 달렸다.

한라산이 아니면 보기 힘든 수종들이다.

흔히 보던 마가목도 여기서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이제 막 열매를 달기 시작했지만 파란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한 마가목은

내 고장 팔공산 동봉에서 비로봉을 향해 선 마가목과는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진달래밭대피소는 지금 수리 중이라 따가운 햇살이 비치는 데크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더운 산행길에 지친 사람들은 땡볕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았다.

나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올라간 아내도 딱히 그늘빛 좋은 곳이 마땅치 않았는지,

땡볕임에도 다른 이들처럼 나무 데크 위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다.

 

늘 나랑 함께 다니는 아내는 이미 내 노는 꼴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나 혼자 놀도록 내버려 두고 자기는 자기 형편에 맞게 움직인다.

그러하다 보니 늘 먼저 올라가 날 기다리는 게 일이다.

나랑 같이 다니면 더 힘든 데나 뭐라나.

 

대피소 화장실 가는 길에 힘 좋고 모양 좋은 진보랏빛 가시엉겅퀴 한 송이가 우뚝 서 있다.

그 놈은 곧 한라산 야생화의 전령이리라.

가시엉겅퀴를 보면서 야생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란 생각이 들자 없던 힘이 불끈 솟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까지도 여전히 조릿대가 난무한다는 점이다.

이 녀석들, 도대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진달래밭대피소까지 오면 이 녀석들의 위세도 한 풀 꺾어지리라 여겼더니 그게 아니었다.

대피소 더 위까지 이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 상태라면 조만간 백록담까지 위협을 받고도 남을 지경이다.

백록담 주변 산상화원도 조릿대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백록담 산상고원도 안심 지역이 아닌 것이다.

 

지금 제주는 조릿대 번식을 제지할 특별연구센타를 운영해

이 녀석을 제거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모양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한시라도 더 빠르게 연구를 진행해 그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서 백록담까지 2.3km

한라산 산행 중 가장 힘든 구간이다.

그러나 나한텐 이 길이 가장 재밌는 구간이다.

여기서부턴 그토록 기다리던,

제주에서만 그것도 한라산 꼭대기에서만 볼 수 있는 야생화가 있고, 전망 또한 일품이다.

남은 2.3km가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지만,

꽃도 보고 경치도 즐기다보면 백록담에 다다르는 것은 여반장이리라.

두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마음은 덩달아 바빠진다.

 

갑자기 후두둑 비가 내린다.

준비한 우의를 입을까 말까 망설이다 귀찮기도 하고,

많이 올 것 같지도 않아 버텨 보기로 했다.

그런데 금방 그칠 것 같더니 생각처럼 빨리 그치질 않았다.

많이 올 비는 아니었지만 사진기 때문에 우의를 걸치지 않을 수 없어 귀찮지만 챙겨 입었다.

 

사진기가 비에 젖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야생화 촬영 시작한지 10여 분쯤 지났나,

아니나 다를까 비는 금방 그쳐버리고 말았다.

젠장, 괜히 꺼내 입었다고 주절대면서도 한 번 입은 우의는 쉽게 내 몸을 떠나지 않았다.

미련 곰탱이처럼 벗기 귀찮아 그냥 그대로 걸치고 다닌 것이다.

백록담에 가서야 아내가 벗으라고 해 벗었다.

 

금줄 너머 노란꽃이 보였다.

곰취인가 싶어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금방망이다.

이 산 저 산 다니며 솜방망이를 많이 봤고 팔공산에서 국화방망이는 봤어도,

금방망이는 처음 대면한다.

싱아처럼 보이는 호장근도 꽃을 피운 채 백록담 가는 길섶에 정원수 마냥 늘어졌다.

팔공산이나 보현산에서 보던 미역줄나무 만큼이나 군락을 이루고 폈다.

 

불가사리처럼 생긴 온 몸에 성난 가시 돋은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많이 모여 있기도 했다.

언뜻 보기에 엉겅퀴류 같아 보였으나 엉겅퀴라 보기엔 뭔가 달라보였다.

이 괴물 같은 녀석은 도대체 뭔가 싶어 딸내미 집으로 돌아와 검색해 봤더니 바늘엉겅퀴란다.

바늘엉겅퀴도 여기서 처음 봤다.

한라산 드센 바람에 적응하기 위해 낮게 옆으로 퍼져 자란 것 같았다.

 

갑자기 신이 난다.

무더위도 산행의 피로함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 달아나고 없다.

호장근, 금방망이, 바늘엉겅퀴 정도만 봤을 뿐인데,

한라산 야생화를 모두 다 본 기분이다.

하지만 한라산 야생화를 보기 위한 본격 탐사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한라산은 과연 내게 무엇을 얼마만큼 보여줄지 자못 기대된다.

 

백록산정에 묻혀 있던 하얀 구름이 싹 걷히기 시작한다.

뛰어 올라가면 활짝 개인 백록담을 구경할 수 있다.

꽃은 내려오면서 찍으면 된다.

그러나 내 몸은 백록담을 향하지 않는다.

주변 야생화에 취해 두 발이 꽁꽁 묶인 것이다.

 

파란하늘과 하얀 구름, 그 아래 온갖 꽃들이 알록달록 피어난 산상화원

과연 꿈에 그리던 모습 그대로다.

, 이런 풍경이 보고파 못 가는 산을 간다.

산이 주는 생명을 갖기 위해서다.

 

돌양지꽃, 곰취, 범꼬리, 기름나물 같은 흔한 애들도 있었지만,

제주 그것도 한라산 정상 가까이 백록담 턱밑까지 가야 볼 수 있는 귀한 애들도 있었다.

구름떡숙, 네귀쓴풀, 섬백리향, 애기솔나물, 구슬오이풀, 제주달구지풀, 한라개승마, 흰그늘용담

이름만 얘기해도 입이 떡 벌어진다. 환상이다.

 

역시 한라산은 한라산이다.

한라산 턱밑까지 쳐들어온 조릿대와 고산에 서식하고 있는 구상나무의 고사로 인해

마음 한 구석 허전함을 떨쳐버릴 수 없더니만,

생전 처음 대면한 이 녀석들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

모르긴 해도 지금 한라산은 기후 변화로 인해 식생 분포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번에 탐방한 한라산 식생은 훗날 한라산 식생 분포의 역사가 담긴 자료로 남을지도 모른다.

 

꽃에 취하고 한라산 맑은 정기에 취하고, 이 순간만은 정말 행복하다.

오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포만감이랄까,

엄홍길씨 같은 전문 산악인들은 이런 기분으로 히말라야 고봉 등정을

하고 또 하는 것이 아닐까?

비교 불가겠지만 감정이입을 통한 동질감을 가져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확 개인 백록담을 볼 수 있더니만,

한라산 야생화에 취해 머뭇거리는 동안 그새 백록담엔 구름이 잔뜩 덮고 있다.

내 하고 싶은 짓 다 하고, 이제야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백록담으로 향한다.

아내는 나보다 1시간 반이나 먼저 올라갔을 것이다.

 

구름에 잔뜩 가려 형태조차 안 보이던 백록담은 거짓말처럼

내가 가자마자 순식간에 걷혀버렸다.

하산하던 어떤 이는 몇 시간이나 기다려도 구름이 걷히지 않아

결국 그냥 내려간다며 푸념하더만,

내가 가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휘장을 걷고 날 반기는 것이 아닌가.

 

오늘 한라산 등반은 정말 꿈만 같다.

어찌 됐던 간에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노릇이다.

꽃에 취하고 백록담에 취하고

한라산의 강렬한 땡볕에도 불구하고,

백록담이 담은 파란하늘 하얀 구름에 도취되었다.

 

그늘 한 점 없는 백록담에서 2시간이나 날 기다리던 아내도

지 몸이 벌겋게 타는지도 모르고 백록담 정경에 푹 빠져 있었다.

구름 덮인 모습, 서서히 걷히는 모습, 활짝 열린 모습을 보면서

아예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날 탓할 만도 한데 오히려 방금 백록담이 걷혔다며 빨리 와서 보라고 재촉한다.

지금 보지 않으면 마치 영원히 못 볼 것처럼 안절부절 한다.

 

아내와 함께 보는 백록담의 변화무쌍함

물이 잔뜩 담긴 백록담

그 물 속에 빠진 하얀 구름

파란하늘

물속에 떠다니는 흰구름

아내와 난 따가운 햇살 아래 백록담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도취된다.

 

내려오는 길에 사라오름을 들렀다.

올라갈 때 사라오름을 갔더라면 관음사로 하산했을 텐데

내려가면서 갈 거라 남겨두었기에 관음사로 하산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어디서 들었는지 관음사 방향은 통제되었다고 해

애당초 관음사로 내려가는 것은 포기하고,

하산 길에 사라오름을 가기 위해 올라갈 땐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백록담에 오르니 관음사에서 올라온 사람

관음사로 내려가는 사람이 많았다.

 

아쉽다. 진즉 알았더라면 올라올 때 사라오름을 보고 관음사로 내려갔을 텐데.

언젠가 겨울 한라산을 왔던 아내가 관음사로 내려가다 지친 기억이 있는지라

처음부터 아내는 관음사 코스를 원하지 않았다.

할 수 없다. 왔던 길 다시 내려 가 사라오름을 갈 수밖에.

 

사라오름은 얼마 전 한라산을 등반한 두 사람이 수영하다 말썽이 난 곳이기도 하다.

물이 잘 차지 않는 분화구임에도

이번 제주에 내린 방대한 양의 비로 인해 사라오름에 물이 가득 찬 것이다.

사라오름 전망대로 가는 데크까지 물이 가득 찼다.

아내와 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했다.

신발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은 다음 전망대로 향했다.

 

뜨거운 화산처럼 불덩어리가 된 발바닥이 순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차가움으로 다가왔다.

백록담을 오르내리느라 고생한 발이 행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사라오름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사람의 등반객이 왜 뛰어 들었는지 이해되기도 했다.

차가운 물에 발을 내 딛는 순간 나도 저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니까.

 

하지만 충동적인 기분으로 규칙이나 기초질서를 흩뜨릴 순 없다.

한 사람 뛰어들기 시작하면 두 사람 세 사람 그 다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지켜야 할 도리는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사라오름! 가지 않았더라면 후회 막심할 뻔 했다.

물에 잠긴 모습을 보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맨발로 전망대까지 걸었던 추억은

아마 오랜 세월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을 명품 장면이다.

역시 멋진 장면 하나 건지자면 그만큼 발품을 팔아야 함을 또 한 번 느낀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백록담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당분간 움직일 기미조차 안 보인다.

지금 저 백록담에 있는 사람들은 파란하늘이 담긴 백록담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높이가 무려 2,000m에 달하다 보니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다.

한라산은 시시각각 변한다.

사라오름 전망대에서 백록담을 바라보며

또 다시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란 생각을 해본다.

오늘 우린 정말 복이 많은 하루였음을.

 

사라오름에서의 감흥과 자세한 내용은

제주오름방에 올려야 하니 여기선 이만하자.

 

딸내미는 회사에서 저녁 먹고 온다기에

우린 딸내미집 근처에 있는 메밀국수 집으로 갔다.

난 곱빼기를 아내는 보통으로 시켰다.

오늘 하루 큰 일 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메밀국수 곱빼기 한 그릇 맛있게 먹고 나니 세상 행복하다.

빨리 집에 가서 사진이나 봐야겠다.

 

*

 

아뿔싸! 전혀 예기치 않은 말썽이 터졌다.

이런 대형 사고가 터져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루 종일 찍은 사진 파일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딸내미 노트북을 이용해 내 사진기 메모리카드에 담긴 500~600장의 사진을

외장하드에 옮기자니 메모리카드가 노트북에 맞지 않았다.

딸내미한테 얘기하니 집에는 카드리더기가 없다기에

하는 수 없이 사진 보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메모리카드는 예비로 준비한 16G가 하나 더 있으니 그걸로 대체하면 된다.

 

그런데 퇴근하고 온 딸내미가 카드리더기를 하나 사왔다.

딴에는 아빠를 생각해 구입해 왔나 본데

그 성의는 간 곳 없고 그만 이 녀석이 그만 안 부려도 될 말썽을 부렸다.

노트북과 메모리카드 그리고 외장하드를 연결해 메모리카드에서 바로 외장하드로 파일을 옮겼다.

 

처음 40여장은 전송이 잘 되었다.

그런데 남아 있는 500장도 넘는 파일이 갑자기 먹통이 되더니 유령 파일로 변해 버렸다.

‘usbc+?’란 파일명으로 바뀌더니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

 

기가 막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같잖아서 말이 안 나온다. 어안이 벙벙했다.

당장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유사한 경우가 적잖이 있었다.

낱낱이 빠짐없이 검색하니 그나마 일말의 희망이 비쳤다.

 

한데 딸내미 노트북 속도가 너무 느려 여기선 살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대구로 돌아가 살리기로 하고 예비로 준비한 메모리카드만 바꿔 넣은 채 일단은 잘 보관해 뒀다.

괜히 딸내미가 사온 카드리더기만 공도 없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인터넷에는 무료복구프로그램이 많이 있었다.

먼저 가장 인기 있다는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걱정과는 달리 복구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웬걸! 그럼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복구프로그램은 500여 장의 사진 중

40여 장만 복구시켜 주더니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았다.

제어판에 들어가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다시 깔아 복구를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더 복구를 원하면 프로그램을 구입하란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가 보다.

 

몇 군데 다른 무료복구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복구를 시도했는데

이건 아예 복구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유료 복구프로램 회사에 전화 해 문의했더니

500여 장의 사진을 복구하는데 15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단다.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꼭 필요한 사진만 복구를 했어야 하는데

없어도 되는 사진만 복구 한 꼴이 됐다.

성질이 나 컴퓨터를 꺼버렸다.

 

일주일쯤 지났나, 여기 저기 다른 무료프로그램을 들락거리다

요행히 또 다른 복구프로그램을 하나 건졌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40여 장밖에 안 될 것 같아 남은 500여 장의 사진 중

꼭 필요한 야생화 사진 위주로 복구 체크를 했다.

50장을 체크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그 50장도 복구가 다 안 되고,

40여 장만 복구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타나는 메시지 더 복구를 원하면 프로그램을 구입하랍신다.”

 

우여곡절 끝에 그나마 백록담 야생화 사진은 좀 건졌다.

모양 좋은 것만을 고르지 못해 아쉬웠다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불행 중 다행이다.

백록담의 멋진 정경도 찾고 싶었다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나한테는 백록담보다는 백록담 주변 야생화 사진이 더 중요하다.

아쉬운 대로 백록담 풍경은 아내가 찍은 휴대폰 사진이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면 된다.

 

한라산 등반과 야생화 탐방은 정말 꿈만 같다.

비록 날아가 버린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날아가도 사진이 날아갔지 한라산에서의 추억마저 날아간 것은 아니다.

한라산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스며있다.

 

한라산은 언젠가 아내와 딸내미랑 어리목에서 영실로 내려 간 적이 있다.

그 때가 겨울인데 그 때 본 한라산 설원의 추억은 정말 환상이었다.

하얀 설원에 먹물을 뿌려 놓은 듯한 까마귀떼와의 조합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엔 남벽이 환하게 보이는 어리목 코스가 아닌 한라산 정상이다.

 

우리가 본 백록담에 물이 담긴 장면은 적어도 1,100mm 정도의 강수량이 내려야

우리가 본 그 정도 양이 찬단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단 한 번의 오름으로 백록담의 진기한 모습을 모두 봤으니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아깝지만 손상된 파일도 그에 반하면 위로가 된다.

 

손상된 파일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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