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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동물

오늘은 한 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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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대로 한 건 했다.

 

 

■ 언제 : 2023. 11. 20.(월) 
■ 어디 : 가창-유등교

■ 누구랑 : 혼자
■ 탐조 내용 : 되새, 양진이

 

오늘도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그저께 내린 눈으로 그늘진 곳은

일부 구간 얼어붙어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올라가던 중이라 길이 얼어붙은 있는 구간에 다다랐을 땐 그냥 갈까 하다가

차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어 조심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

슬로우 모드로 내쳐 올라갔다.

 

그냥 돌아갔어야 하는데 무시하고 올라갔더니

급기야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만약 속도가 있었다면 차가 한 바퀴 돌아 그다음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일단정지하고 살짝 후진을 해봤지만

이미 빙판에 미끄러진 차가 내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이보다 더한 한겨울에도 얼어붙은 이 길을 다닌 적이 있어 잠깐 방심했더니만

결국 이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진퇴양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구원의 손길마저 내밀 데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려오는 차나 올라가는 차가 있었다면 더더욱 곤란했을 텐데

그런 상황에 직면하진 않았다.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침착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 후

차를 앞으로 뒤로 살짝살짝 움직이며 내 차의 반응을 살폈다.

차량이 왼쪽으로 돈다면 그나마 다행이고 오른쪽으로 돈다면 나는 그 길로 황천길이다.

 

차는 자꾸 오른쪽으로 기울고 이미 내 차는 가장 미끄러운 빙판 위에 곡예하듯 서있다.

"큰일이다."

"119를 불러야 하나."

"부르는 게 맞겠지."

 

주머니에 든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하려다

자력으로 한번 더 애써 보고 도저히 감당이 안되면

그때 119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며 스스로 자구지책을 모색했다.

 

천신만고 끝에 빙판 위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눈길을 다녀본 경험이 더러 있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오르막 빙판길을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는 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무사히 탈출한 기념으로 계속 올라갔다.

이젠 이 길을 바로 내려갈 수도 없다.

이 길이 녹을 때를 기다렸다가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 시간이 가면 길은 어느 정도 녹을 것 같았다.

 

위쪽으로 계속 올라갔더니 또 눈이 녹지 않은 구간이 나온다.

방금 식겁한 터라 아예 접근할 생각조차 못하고 바로 돌아내려와 주탐조지로 갔다. 

새가 있던 없던 거기서 시간을 보낼 참이다.

 

빙판이 녹아야 하니까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오늘은 걸어서 가지 않았던 길까지 멀리 돌았다.

그래도 새는 없다.

짜슥, 식겁한 요량하면 얼굴을 좀 보여줄 만도 한데 인정머리가 없다.

 

내가 여기 오면서 봐둔 자리가 한 군데 있다.

거기서 죽치고 있기로 했다.

다행히 여긴 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낙엽송이라 일컫는 일본잎갈나무 높은 가지에 되새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쇠박새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밉다고 직박구리 녀석도 나타나 시끄럽게 지저귀더니 이내 날아간다.

그래. 너라도 아무도 없는 공허함 보다야 그래도 뭣이라도 있는 게 낫지.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되새를 찍고 있는 높은 마른나무가지에 갑자기 양진이가 나타났다.

가만히 눈여겨보니 한 마리가 아니다.

여기저기 몇 마리가 나타나 일본잎갈나무 씨앗을 쪼아대고 있다.

 

몸을 숨기고 있고 게다가 마른나무가지 틈새로 녀석을 잡자니 초점 잡기도 쉽잖다.

어째어째 녀석과 씨름하고 있자니

내 뒤쪽에서도 새 소리가 난다.

거기는 색감이 더 짙은 양진이 성조 수컷이 보였다.

 

이게 뭔 조화인가 싶어 배가 빨간 녀석을 겨냥하고 있는데

갑자기 쇠박새가 나타나더니 양진이 성조 수컷이 있는 곳에서

물을 먹기 위해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주변엔 양진이 수컷뿐만 아니라 암컷도 두 마리 더 앉아 있었다.

또 다른 수컷도 한 마리 더 있었고.

 

아마 거기가 녀석들의 옹달샘이었던가 보다.

쇠박새의 움직임을 보고 비로소 녀석들이 물을 먹기 위해 여기 날아왔음을 알게 되었지만

내겐 더없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좀 전에 빙판길 위에서의 아찔한 순간은 어디가고 없다.

 

마음이 심쿵했지만 우선 진정하고 녀석들의 동태를 살폈다.

양진이 암컷 한 마리가 물을 마시기 위해 살포시 내려앉는다.

옳거니. 난 쾌재를 부르며 멀찍이 돌아 샘터가 있는 바위 뒤로 가 숨었다.

다행히 바위가 가림막이 되어주었다.

 

바위 뒤에 숨어 녀석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니 먼저 암컷 한 마리가 내려온다.

수컷은 도통 내려올 기미가 없다.

곧 내려올 것 같은데 내려오지 않고 앉은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아마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나무에 앉은 모습은 많이 찍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젠 내려가는 빙판길도 어느 정도 녹았을 것 같아

이 녀석들을 그만 애태우고 오늘은 그냥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녀석들에게 안정감을 심어주는 것도 나랑 길게 놀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니

오늘은 그만하고 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짜슥들, 니들 딱 걸렸어.

내 오늘은 그만하고 그냥 가니 다음에 또 보자.

이젠 내 얼굴 익혔고 내가 하는 행동까지 지켜봤으니

내가 니들한테 해 끼칠 사람으론 보이지 않지.

 

다음에 또 보거든 이젠 아는 척 좀 하자.

물이 마르면 니들 마실 물은 내가 넉넉히 준비해 오마.

혹시 물이 말랐다고 다른 곳으론 가지 말어라. 알것지.

짜식들

 

오늘은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대박이 난 날이기도 하다.

 

내 이 녀석을 만나러 도대체 여길 몇 년째 몇 번이나 왔던가?

올 때마다 허탕만 치고 갔던 이 길에서

오늘 제대로 한 건 했다.

 

집념이 위험도 이겨냈고

운도 가져다준 날이다.

두드리면 열리게 마련인 모양이다.

 

 

 

 

 

되새

 

 

얘도 양진이 맞겠지?

 

 

찍힌 상황과 빛 때문에 이름 붙이기 아리송하다. 얘도 그냥 양진이 맞겠지.

 

 

얘들도 아리송하긴 한데 그냥 양진이가 맞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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