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원앙을 보겠나 우려했는데 결국 봤다. 그것도 떼거리로...
■ 언제 : 2020. 12. 24.(목)
■ 어디로 : 청도 모처
■ 누구랑 : 혼자
흔적
누군가 조류 밴드에 원앙을 찍어올렸다.
찍은 장소는 지역만 명시되어 있고 정확한 지점은 밝히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대충 어딘지는 알겠다.
하지만 조류 탐조는 대충 알고 접근해선 공염불하기 십상이다.
궁금해서 살짝 1:1 대화창으로 어딘지 확인해 봤다.
내가 검색했던 그곳이 맞았다.
생각보다 대수술을 앞둔 내 애마가 빨리 치유되었다.
아침 10시경 애마를 인수하고 원앙을 보러 한 달음에 달려갔다.
생각보다 하천은 길었다.
녀석들이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
이럴 땐 주저없이 촉감이 발동하는 곳으로 먼저 간다.
촬영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쉬운데 애석하게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소문난 곳이면 분명 촬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좀은 의아하기도 했다.
오늘은 날씨도 좋다. 바람도 없고 촬영하기엔 빛도 적당했다.
소문난 곳이고 이런 날씨면 찍사가 없진 않을 텐데... 잘못 짚었나?
먼저 찾아 나선 길에 원앙이 없다.
흰뺨검둥오리와 청둥오리 무리 속에 간간히 한두 마리 보일 뿐이다.
이건 아닌데...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갔다. 끝까지 갔다.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촉감 발동이 잘못된 모양이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갔다.
지역 주민인 듯한 아주머니 한 분과 아저씨 한 분이 지나가길래 물어봤다.
이 분들 이 동네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나보다 정보가 더 어둡다.
전혀 모르고 있다. 까막눈이다.
순간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처음부터 엉뚱한 곳을 탐조해
졸지에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먹구름만 잔뜩 끼기 시작했다.
순간 금년 5~6월 영천 모처에 원앙이 육추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달려갔다가
매번 실패하고 결국 빈손으로 그냥 돌아서야만 했던 악몽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찾아야 한다. 이 동네 있는 건 분명하니까 찾다보면 눈에 띌 것이다.
만약 하천에 머무를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면 오늘은 빈손으로 가야한다.
조복이 따른다면 호황을 누릴 수도 있다.
오롯이 운수 소관이다.
내가 주민한테 원앙이 어디에 있는지 몰어본 바로 그 다리 옆에
50~60마리나 되는 원앙이 떼로 모여 있었다.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다.
쟤들 또 흰뺨이 식구들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욘석들은 바로 내가 찾던 원앙이었다.
200~300마리 정도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대충 50여 마리 정도 되어보였다.
그게 어딘가? 난생 처음보는 원앙 군락이다.
처음부터 이 길로 들어섰다면 바로 봤을 텐데 반대편으로 가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덕분에 운동은 잘했다만 가짠아서 실웃음이 나왔다.
신이나서 마구마구 셔터를 눌렀다.
한창 신나게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아지자 내가 더 불안했다.
촬영 장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라 녀석들도 분명 우리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잠자는 듯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녀석들의 시각과 청각은 우리랑 차원이 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찍사들이 모여들자 녀석들 중 한두 마리가 허공을 날기 시작하더니
모두 일시에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하고 만다.
그 장면을 놓칠새라 허겁지겁 사진기를 겨냥하고 찍긴 했다만
50여 마리의 원앙은 삽시간에 공허한 메아리만 남기고 정적만 감돌았다.
녀석들 당분간 이 자리에 오지 않을 것이다.
녀석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나도 길을 나섰다.
하천 끝까지 따라갔다.
종적을 감춘 녀석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꿩대신 닭이라 했던가?
대신 눈에 보이는 대로 담았다.
대백로, 쇠백로, 흰뺨이, 쇠오리, 청둥오리, 알락할미새, 딱새 암컷
논병아리, 가창오리, 물닭, 청머리오리 암/수
보기도 많이 봤다.
볕도 좋고 날씨도 좋아 오늘은 촬영 조건이 매우 좋았다.
이 정도면 조복도 좋은 편이라 오늘 하루는 아주 즐거운 행차가 되었다.
사진 정리할 일이 꿈같다만, 백수에게 시간이 문제되진 않는다.
할 일이 많을 수록 더 좋은 게 백수의 삶이다.
조류 같은 경우 한 번 출사 나가면 기본이 500장에서 많을 때는 수천 장을 담아온다.
그렇게 담아온 사진을 느긋하게 다듬는 시간은
내게 가장 큰 행복이다.